러시아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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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Русская революция, Russian Revolution)은 1917년 러시아 제국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혁명이다. 2월 혁명(율리우스력 2월, 양력 3월)으로 로마노프 왕조의 차르 니콜라이 2세가 물러나고 임시정부가 들어섰으며, 10월 혁명(율리우스력 10월, 양력 11월)으로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소비에트 정권을 세웠다. 넓게는 이어진 내전(1918~1921년)과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 수립까지를 함께 가리키기도 한다.
혁명은 제1차 세계 대전의 부담 속에서 일어났다.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여성 노동자 시위가 군대 반란으로 번지면서 300년 넘은 로마노프 왕조가 며칠 만에 끝났다.[1] 그러나 임시정부는 전쟁을 계속하고 토지 문제를 미루다 지지를 잃었고, 볼셰비키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와 평화·토지 약속으로 노동자와 병사를 끌어모아 권력을 잡았다. 소비에트 정부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전쟁에서 빠져나왔지만 곧 적군과 백군, 외국 간섭군이 뒤엉킨 내전에 빠졌다.
러시아 혁명은 세계 최초로 공산당이 국가 권력을 잡은 사건이다. 소련 정부는 70년 넘게 10월 혁명을 새 질서의 출발점으로 기념했고, 반대파와 많은 서방 역사가는 소수의 무장 쿠데타로 보았다.[2] 혁명이 낳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은 20세기 내내 세계 정치를 갈랐고, 제2차 세계 대전 뒤 냉전의 한 축이 되었다. 연해주의 한인 민족운동가들도 혁명의 영향을 받아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을 만들었다.
혁명 당시 러시아는 율리우스력(구력)을 썼다. 20세기에 율리우스력은 서유럽의 그레고리력(신력)보다 13일 늦었기 때문에, 율리우스력 2월 23일에 시작된 '2월 혁명'은 그레고리력으로 3월 8일, 10월 25일의 '10월 혁명'은 11월 7일에 일어났다. 소비에트 정부는 1918년 1월 24일 그레고리력을 채택하기로 결정했고, 그해 2월 1일 다음 날을 2월 14일로 바꿨다.[3] 그래서 같은 사건을 '2월 혁명'과 '3월 혁명', '10월 혁명'과 '11월 혁명'으로 달리 부르며, 국내 교과서와 사전에서도 두 이름이 함께 쓰인다.[4]
이 문서는 1918년 2월 이전 날짜를 율리우스력으로 쓰고 괄호 안에 양력을 적는다.
'볼셰비키'(다수파)와 '멘셰비키'(소수파)라는 이름은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레닌 쪽이 표결에서 이겨 붙은 것이다. 볼셰비키는 1918년 당 이름을 '러시아 공산당'으로 바꿨다.[5] '소비에트'(совет)는 러시아어로 '평의회'라는 뜻이다.
19세기 말 러시아는 황제(차르)가 법 위에서 통치하는 전제 군주국이었다. 1861년 농노 해방 뒤에도 농민 대다수는 마을 공동체에 묶여 빚과 좁은 땅에 시달렸고, 철도와 공장이 늘어나면서 도시에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층이 생겼다. 제1차 세계 대전 직전 제국 인구의 약 20%인 2,840만 명이 도시에 살았고,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인구는 200만, 모스크바는 약 170만이었다.[6]
정치 결사와 언론이 막힌 가운데 지식인 사이에서는 농민 공동체를 바탕으로 한 혁명을 꿈꾼 인민주의(나로드니키)와, 도시 노동자 계급을 혁명의 주체로 보는 마르크스주의가 퍼졌다. 1898년 만들어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1903년 직업 혁명가 중심의 규율 있는 당을 주장한 레닌의 볼셰비키와, 더 넓은 대중 정당을 원한 율리 마르토프의 멘셰비키로 갈렸다. 농민을 기반으로 한 사회혁명당(에스에르)도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잇따라 지던 1905년 1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차르에게 청원하러 가던 노동자 행렬에 군대가 총을 쏜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서 파업과 농민 봉기, 흑해 함대 전함 포템킨호의 수병 반란 같은 군대 반란이 이어졌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생겼다. 니콜라이 2세는 그해 10월 선언으로 입법권을 가진 의회(두마)와 시민적 자유를 약속해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황제는 두마를 여러 차례 해산하며 실권을 놓지 않았고, 총리 표트르 스톨리핀의 토지 개혁도 1911년 그가 암살되면서 끝을 보지 못했다.
1914년 러시아는 협상국 편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러시아군은 타넨베르크에서 크게 졌고 1915년 폴란드 지역을 잃었으며,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1915년 니콜라이 2세가 직접 총사령관을 맡으면서 패전의 책임이 황제에게 돌아갔고, 수도에서는 황후 알렉산드라와 수도사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국정에 끼어든다는 소문이 돌았다.
전선의 피란민이 후방 도시로 몰리고 사람과 물자가 군대로 빠져나가면서 생긴 물자 부족은 차르 정권의 정당성을 무너뜨렸다.[6] 정부가 전비를 대려고 돈을 찍어 내자 물가가 뛰었고, 철도가 군수 수송에 묶이면서 곡물이 도시에 제대로 닿지 않았다. 1917년 초 페트로그라드(191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바뀐 이름)에서는 빵을 사려는 줄이 길게 늘어섰다.
| 율리우스력 | 그레고리력 | 사건 |
|---|---|---|
| 1917년 2월 23일 | 3월 8일 | 세계 여성의 날 시위, 2월 혁명 시작 |
| 2월 27일 | 3월 12일 | 수비대 반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결성 |
| 3월 1일 | 3월 14일 | 소비에트 '명령 제1호'(병사위원회 선출) |
| 3월 2일 | 3월 15일 | 임시정부 수립, 니콜라이 2세 퇴위 |
| 4월 3일 | 4월 16일 | 레닌 귀국, 다음 날 4월 테제 발표 |
| 4월 18일 | 5월 1일 | 밀류코프 각서, 4월 위기 |
| 7월 3~5일 | 7월 16~18일 | 7월 사태(무장 시위) |
| 8월 27~31일 | 9월 9~13일 | 코르닐로프 사건 |
| 10월 10일 | 10월 23일 |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무장봉기 결의 |
| 10월 24~26일 | 11월 6~8일 | 10월 혁명, 겨울궁전 점령, 평화·토지 포고 |
| 11월 12일 | 11월 25일 | 제헌의회 선거 시작 |
| 12월 2일 | 12월 15일 | 동맹국과 휴전 협정 |
| 12월 7일 | 12월 20일 | 체카(비상위원회) 창설 |
| 1918년 1월 5일 | 1월 18일 | 제헌의회 개회, 다음 날 해산 |
| 1918년 3월 3일 |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 |
| 1918년 7월 17일 |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황제 일가 총살 | |
| 1919년 3월 |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창립 | |
| 1921년 3월 | 크론시타트 반란 진압, 신경제정책 도입 | |
| 1922년 12월 30일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수립 | |
| 1924년 1월 21일 | 레닌 사망 | |
날짜는 각 절 각주의 자료를 따랐다.
2월 23일(양력 3월 8일) 사회주의 기념일인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페트로그라드의 여성 노동자들이 식량 부족과 빵값 폭등에 항의하며 거리로 나왔다. 이전에도 이런 시위는 있었지만, 이번에는 혁명 지하 조직의 호소 속에 며칠 동안 남녀 시위대가 불어나 도심으로 행진했다. 경찰과 카자크 기병, 볼린스키 연대 병사들이 해산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2월 27일(3월 12일)에는 핵심 부대들이 시위대 편으로 넘어가 무기고를 차지하고 이튿날 차르 정부의 장관들을 체포했다.[1]
같은 날 저녁 노동자와 병사 대표들이 타브리다 궁전에 모여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를 만들었다. 소비에트는 처음에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주도했다. 3월 1일(3월 14일) 소비에트가 발표한 '명령 제1호'는 부대마다 병사위원회를 뽑아 무기를 맡기고, 장교가 병사를 반말로 부르는 것을 금지했다. 2월 혁명 당시 러시아 육군은 약 750만 명이었는데, 이 명령으로 장교의 통제력이 크게 흔들렸다.[7]
전선 사령부에 있던 니콜라이 2세는 수도로 돌아가 질서를 되찾으려 했으나, 장군들과 두마 대표단은 퇴위만이 사태를 수습할 길이라고 설득했다.[1] 황제는 혈우병을 앓던 아들 알렉세이 대신 동생 미하일 대공에게 제위를 넘겼지만, 미하일이 이를 받지 않으면서 로마노프 왕조는 끝났다.[8] 3월 2일(3월 15일) 두마 임시위원회는 스스로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군중이 입헌민주당(카데트) 지도자 파벨 밀류코프에게 "누가 당신들을 뽑았느냐"고 외치자 그는 "러시아 혁명이 우리를 뽑았다"고 답했다고 한다.[1]
임시정부는 첫 총리 게오르기 리보프 공을 비롯해 자유주의자 중심으로 꾸려졌고, 사회주의자로는 법무장관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유일하게 들어갔다. 임시정부는 정치 체제를 정할 권한이 제헌의회에 있다고 인정했고,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조건부로 지지했다. 이렇게 정부와 소비에트가 권력을 나눠 가진 상태를 '이중 권력'이라 부른다. 소비에트는 곧 다른 도시와 농촌에도 생겼다.[1]
임시정부는 가장 절박한 전쟁과 토지 문제를 위원회에 넘기거나 제헌의회로 미뤘다. 돌아보면 이런 미루기가 임시정부를 무너뜨린 원인이었다고 평가된다.[1] 물가가 뛰면서 노사가 맺은 임금 합의는 금세 휴지가 되었고, 노동자는 공장위원회를 만들어 노동자 통제를 요구했으며, 농민은 소작료 거부와 지주 토지 점거에 나섰다.[9]
제국이 무너지자 비러시아 민족들도 자치와 독립을 요구했다. 1917년 3월 초 키예프(키이우)에서 우크라이나 중앙 라다가 만들어졌고, 핀란드와 캅카스, 투르키스탄(중앙아시아), 타타르 지역에서도 민족 운동이 일어났다. 혁명과 내전을 거쳐 실제로 독립을 지켜 낸 것은 핀란드, 폴란드, 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뿐이었고, 그 밖의 독립 정부는 대부분 오래가지 못했다.[10]
스위스에 망명해 있던 레닌은 독일 정부가 내준 열차로 독일 땅을 지나 4월 3일(4월 16일) 밤 페트로그라드 핀란드 역에 도착했다.[11] 러시아를 전쟁에서 빼내려던 독일이 반전파 레닌의 귀국을 도운 것이다. 이 열차는 흔히 '봉인 열차'로 불린다.[9] 레닌은 4월 4일(4월 17일) 회의에서 읽은 테제를 4월 7일 《프라우다》에 실었다. 이것이 '4월 테제'다.[11]
4월 테제는 임시정부 아래의 전쟁도 제국주의 전쟁이라며 지지를 거부하고, 부르주아에게 권력을 준 첫 단계에서 노동자와 빈농이 권력을 잡는 둘째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고 했다. 임시정부 불지지, 의회 공화국이 아닌 소비에트 공화국, 지주 토지 몰수와 국유화, 당명을 공산당으로 바꾸고 새 인터내셔널을 만드는 것 등을 담았다.[11] 볼셰비키 지도자들도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레닌은 이들을 설득해 당의 노선으로 만들었다.[9]
외무장관 밀류코프가 4월 18일(5월 1일) 연합국에 전쟁을 끝까지 계속하겠다는 각서를 보낸 사실이 알려지자 대규모 시위와 충돌이 벌어졌다(4월 위기). 밀류코프와 육군장관 구치코프가 물러났고, 5월 5일(5월 18일) 사회혁명당의 빅토르 체르노프와 멘셰비키의 이라클리 체레텔리 등이 입각해 연립정부가 섰다. 이로써 두 사회주의 정당은 전쟁을 계속하는 정부와 한 몸이 되었다.[9]
임시정부가 6월 말 벌인 대공세(케렌스키 공세)는 독일·오스트리아군의 반격으로 실패했다. 7월 3~5일(7월 16~18일)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병사와 노동자, 크론시타트 수병들이 무장 시위를 벌여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 권력을 잡으라고 요구했다.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신중론을 폈지만 당 군사조직은 시위를 지지해 태도가 엇갈렸다. 임시정부는 볼셰비키가 독일 돈을 받았고 레닌이 독일 간첩이라는 수사 내용을 공개했고, 시위는 진압되었다.[12]
뒤이은 탄압으로 레닌은 핀란드로 몸을 숨겼고 트로츠키 등은 체포되었다.[2] 7월 사태 뒤 리보프가 물러나고 케렌스키가 총리가 되었다.
여름 내내 공장 폐쇄와 파업, 식량·연료 유통 붕괴, 농민의 토지 점거가 이어졌다. 7월 18일(7월 31일) 최고사령관에 임명된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은 혁명의 '혼돈'을 끝낼 구원자로 보수·중도 정치인, 군 수뇌부, 기업가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군대 기강이 무너진 책임이 소비에트에 있다고 보았다.[13]
8월 27일(9월 9일) 케렌스키와 모호한 연락을 주고받던 코르닐로프는 크리모프 장군에게 기병 제3군단과 '야만 사단'을 이끌고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를 반란자로 선언하고 소비에트에 도움을 청했다. 소비에트가 동원한 적위대(무장 노동자), 수비대, 그리고 군대 수송 열차를 멈춰 세운 철도 노동자들 덕분에 시도는 실패했고, 8월 31일(9월 13일)까지 크리모프는 자살하고 코르닐로프는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케렌스키와 임시정부의 권위는 크게 떨어졌고, 반혁명을 경고해 온 볼셰비키가 가장 큰 이득을 보았다.[13]
코르닐로프 사건 뒤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차지했다. 핀란드에 숨어 있던 레닌은 9월 중앙위원회에 지금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다그쳤다. 다른 볼셰비키 다수는 곧 열릴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사회주의 연립 정부를 세우기를 바랐으나, 레닌은 무장봉기를 고집했다. 몰래 돌아온 레닌은 10월 10일(10월 23일) 중앙위원회에서 10 대 2로 무장봉기 결의를 얻어 냈다. 반대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이를 공개했지만 임시정부는 손을 쓰지 않았다.[2]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군사혁명위원회를 봉기 지휘부로 삼았다. 이 위원회는 트로츠키가 주도했다. 케렌스키가 볼셰비키 인쇄소를 폐쇄하자 이것이 봉기의 방아쇠가 되었다. 10월 24일(11월 6일) 적위대와 병사들이 수도의 요충지를 차지하기 시작했고, 이튿날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들에게 볼셰비키가 소비에트의 이름으로 권력을 잡았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순양함 오로라호가 장관들이 모여 있던 겨울궁전을 향해 공포탄을 쐈고, 적위대가 궁전에 들어갔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대의원들이 항의하며 대회장을 떠나자, 트로츠키는 그들에게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가라고 했다.[2] 페트로그라드의 권력 장악은 사상자가 적었지만, 모스크바에서는 일주일 가까이 시가전이 벌어졌다.
10월 26일(11월 8일) 새벽 소비에트 대회는 임시정부 타도를 선언하고, 그날 저녁 '평화에 관한 포고'와 '토지에 관한 포고'를 채택했다.[14] 평화 포고는 모든 교전국에 합병과 배상금 없는 "정의롭고 민주적인 강화"를 위한 즉시 협상을 제안했다.[15] 토지 포고는 사회혁명당 강령과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토지 사유를 "영원히" 폐지하고 땅을 경작하는 사람에게 넘긴다고 했다. 이미 농촌에서 벌어진 토지 점거를 추인한 것이어서 농민들에게 새 정부의 정당성을 심어 주었다.[14][16]
대회는 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인민위원회의(소브나르콤)를 새 정부로 승인했다. 위원은 모두 볼셰비키였고 트로츠키가 외무 인민위원, 이오시프 스탈린이 민족 인민위원을 맡았다. 새로 뽑힌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101명 가운데 62명이 볼셰비키, 29명이 좌파 사회혁명당이었다.[14] 좌파 사회혁명당은 12월 인민위원회의에도 참여했다.
레닌은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 없었지만 임시정부가 정해 둔 제헌의회 선거는 그대로 치르게 했다. 11월 12일(11월 25일)부터 치른 선거에서 약 4,200만 표 가운데 여러 계파의 사회혁명당이 절반 가까이를 얻었고, 볼셰비키는 약 1,000만 표(24%)로 군인 표의 절반가량을 가져갔으며, 카데트는 약 200만 표(5%)를 얻었다. 레닌은 12월 13일 《프라우다》에 실은 테제에서 이 선거가 10월 혁명을 지지한 좌파 사회혁명당과 반대한 우파를 구분하지 못한 명부로 치러졌고, 소비에트 공화국이 제헌의회보다 높은 형태의 민주주의라며 결과에 따르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17]
1918년 1월 5일(1월 18일) 약 700명의 대의원이 타브리다 궁전에 모여 우파 사회혁명당 지도자 체르노프를 의장으로 뽑고 휴전 승인과 토지법을 통과시켰으나, 다음 날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의 명령으로 적위대가 회의장을 막아 제헌의회는 단 한 번의 회의로 끝났다. 체르노프 등은 볼가 지역에 제헌의회 정부를 세웠으나 1918년 11월 백군의 콜차크 제독에게 무너졌다.[17]
소비에트 정부는 독일군 점령지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동맹국(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불가리아, 오스만 제국)과 협상해 1917년 12월 2일(12월 15일) 휴전 협정을 맺었다. 외무 인민위원 트로츠키는 유럽 노동자의 혁명을 기대하며 협상을 선전 무대로 쓰는 '전쟁도 평화도 아닌' 전술을 폈다. 그러나 1918년 2월 18일 독일군이 공격을 재개하고 더 가혹한 조건을 내걸자, 레닌은 중앙위원회 다수를 설득해 조건을 받아들였다.[18]
1918년 3월 3일 맺은 조약으로 러시아는 정해진 선 서쪽의 옛 영토(폴란드, 리투아니아, 쿠를란트 등)에 대한 주권을 포기했고, 캅카스의 아르다한·카르스·바투미에서 군대를 빼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강화하며 에스토니아·리보니아·핀란드에서도 군대와 적위대를 물리기로 했다.[19] 레닌은 이 조약을 '숨 돌릴 틈'이라 불렀다.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산 셈이었다. 좌파 사회혁명당은 항의로 인민위원회의에서 물러난 뒤 1918년 7월 독일 대사 미르바흐 백작을 암살하고 모스크바에서 봉기했다.[18] 조약은 1918년 11월 독일이 패전하면서 무효가 되었다.
내전은 1918년부터 1921년까지 이어졌다.[20] 적군에 맞선 세력은 제헌의회 복원을 내건 사회혁명당 세력, 옛 제국군 장교들이 이끈 백군(시베리아의 콜차크, 남러시아의 데니킨과 브란겔, 북서부의 유데니치 등), 민족 독립 운동, 어느 쪽에도 서지 않은 농민군과 아나키스트(우크라이나의 마흐노 등)로 갈라져 있었다.[10]
인민위원회의는 1918년 1월 15일(1월 28일) '노농 적군' 창설을 결정했다. 처음에는 지원병제였으나 1918년 3월 육해군 인민위원이 된 트로츠키는 옛 제국군 장교를 '군사 전문가'로 끌어들이고 그들을 감시할 정치위원(코미사르)을 붙였으며, 징병제를 도입했다. 적군은 1918년 말 약 70만 명에서 1년 뒤 300만 명 가까이로 커졌다.[21]
외국 군대도 들어왔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뒤 일본과 미국 등 연합국 군대가 독일에 요충지를 넘기지 않고 백군을 돕는다며 북러시아, 우크라이나, 시베리아 일부를 차지했다. 세계 대전이 끝나자 연합국은 군대를 남겨 둘 명분을 찾기 어려웠고, 1919년 3월 미국 대표단의 윌리엄 불릿이 비밀리에 모스크바에서 내전 종식과 연합군 철수안을 받아 왔지만 연합국 지도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22] 일본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돕는 미·일 공동 출병을 계기로 1918년 시베리아에 군대를 보냈고,[23] 1921년에도 연해주를 점령하고 있었다.[5]
1917년 12월 7일(12월 20일) 인민위원회의는 펠릭스 제르진스키가 이끄는 '반혁명·사보타주 단속 전러시아 비상위원회'(체카)를 만들었다. 체카는 뒤의 게페우(GPU), 엔카베데(NKVD), 카게베(KGB)로 이어지는 소련 비밀경찰의 시작이었다. 1918년 8월 모이세이 우리츠키가 암살되고 레닌이 총격을 당하자, 9월 인민위원회의는 체카에 반혁명 세력과 계급의 적을 향한 '적색 테러'를 허가했다. 페트로그라드에서만 500명 넘게 처형되었고, 1918년 20개 주에서 체카가 처형한 6,300명이라는 공식 숫자도 실제보다 적을 것으로 본다.[24]
1918년 8월 11일 레닌이 펜자 주 공산당원들에게 보낸 전보는 소련이 무너진 뒤 공개되었다. 레닌은 농민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라며 이름난 부농(쿨라크) 최소 100명을 사람들이 보도록 목매달고, 곡물을 모두 빼앗고, 인질을 처형하라고 지시했다.[25]
내전 동안 소비에트 정부는 농촌에서 곡물을 징발해 적군과 도시에 나눠 주고 크고 작은 공업을 국가가 운영했다. 레닌이 뒤에 '전시 공산주의'라고 부른 이 정책은 백군이 패한 1920년에도 오히려 강화되었다. 공산주의로 단숨에 넘어가려는 이념 탓으로 보는 견해와 식량 부족을 메우려는 궁여지책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26] 식량 징발대와 빈농위원회는 농민의 거센 반발을 샀다.[27]
퇴위한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 다섯 자녀(올가, 타티야나, 마리야, 아나스타샤, 알렉세이)는 가택 연금 끝에 우랄의 예카테린부르크로 옮겨져 우랄 소비에트의 감시를 받았다. 백군이 이들을 구출하려 한다는 것을 우려한 우랄 소비에트는 일가를 처형하기로 했고, 1918년 7월 17일 새벽 일가와 주치의 예브게니 보트킨 등 시종 네 명이 이파티예프 저택 지하실에서 총살되었다. 시신은 폐광에 버리려다 실패한 뒤 근처 들판에 묻혔다.[8] 처형을 모스크바의 레닌과 야코프 스베르들로프가 직접 지시했는지는 결정적 문서가 없어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린다.
1921년 2월 28일 크론시타트 해군 기지의 수병들은 집회·언론의 자유, 공산당 권력 독점 종식, 전시 공산주의 통제 철폐를 요구하는 15개조 결의를 내고 "정당이 아닌 소비에트에 모든 권력을"이라는 구호 아래 섬을 장악했다. 10월 혁명 때 볼셰비키의 가장 든든한 동맹이던 수병들의 반란이었다. 트로츠키가 조직하고 투하쳅스키가 지휘한 약 4만 5천 명의 진압군이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 공격해 3월 18일 반란을 진압했다.[28]
레닌은 같은 3월 제10차 당대회에서 신경제정책(네프)을 내놓았다. 곡물 징발을 가벼운 현물세로 바꾸고 남은 농산물은 시장에 팔게 했으며, 소규모 공업·상업의 사영과 외국 자본의 이권을 허용했다. 레닌은 대공업·은행·대외 무역 같은 '관제고지'만 국가가 쥐는 후퇴라고 설명했다. 경제는 1926~1927년 무렵 대부분 전쟁 전 수준을 되찾았고, 네프는 스탈린이 5개년 계획과 농업 집단화에 나선 1929년 무렵 사실상 폐기되었다.[26] 같은 당대회는 당내 분파를 금지했다.[28]
1921년 볼가 유역에 두 해 연속 흉작이 들면서 대기근이 일어났다. 최소 2천만 명이 굶주렸고, 소비에트 정부는 서방에 도움을 청해 허버트 후버의 미국구호청(ARA)이 2년 동안 약 1천만 명에게 식량과 의약품을 댔다. 그래도 약 500만 명이 기근과 그에 따른 콜레라·발진티푸스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29]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자캅카스 네 소비에트 공화국이 연방 조약을 승인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이 탄생했다. 민족 인민위원 스탈린은 다른 공화국들을 러시아 연방의 자치 공화국으로 편입하자고 했으나, 그루지야(조지아) 공산당 지도자들이 반발하고 병상의 레닌이 이들을 편들어 형식상 대등한 공화국들의 연방이 되었다.[30] 레닌은 세 차례 뇌졸중 끝에 1924년 1월 21일 쉰네 살을 앞두고 숨졌다. 시신은 본인과 가족의 뜻과 달리 방부 처리되어 붉은 광장 영묘에 안치되었고, 1월 26일 페트로그라드는 레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다.[31]
1919년 3월 모스크바에서 제3인터내셔널(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코민테른)이 창립되었다. 1920년 7~8월 제2차 대회는 볼셰비키식 '민주집중제'와 기존 사회민주주의 정당과의 결별을 요구하는 가입 조건 21개조를 채택했다. 1935년에는 반파시즘 '인민 전선'을 내걸었다. 코민테른은 점차 소련 공산당과 소련 국익에 종속되었고 1943년 해산되었다.[32]
러시아 혁명 직후 유럽에서는 독일 혁명(1918~1919년)과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1919년) 같은 혁명이 잇따랐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 시기에 공산주의 세력이 권력을 지킨 곳은 1921년 몽골 인민혁명이었다. 아시아와 식민지 민족운동에는 레닌의 반제국주의와 민족자결 지지가 큰 영향을 주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에 따르면 레닌은 1917년 11월 15일 러시아 안 100여 소수 민족에게 민족자결을 원칙으로 한 '러시아 제민족의 권리 선언'을 선포해 식민지 지배를 받던 아시아의 피압박 민족을 고무했다. 같은 책은 레닌과 윌슨의 '민족자결'이 겉으로는 같은 원칙이었지만, 윌슨은 열강의 협약과 국제 연맹 위임 통치로 점진적인 해결을 꾀한 반면 레닌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제국주의를 무너뜨리려 했다는 점에서 본질이 달랐다고 설명한다.[33] 코민테른의 지원 아래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는 등 아시아 각지에 공산당이 생겼다.
러시아 혁명만큼 정치적 입장에 따라 해석이 갈린 사건은 드물다. 해석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 소련의 공식 해석(마르크스-레닌주의): 10월 혁명은 노동자 계급이 차르와 자본가를 몰아낸 필연적인 사회주의 혁명이었고, 볼셰비키는 그 전위였다. 소련은 11월 7일을 최대 국경일로 기념했다.
- 서방의 '전체주의' 해석(전통주의 학파): 냉전 초기에 굳어진 해석으로, 10월 혁명을 소수 직업 혁명가가 혼란을 틈타 일으킨 쿠데타로 보고, 러시아가 민주 정치를 세울 기회를 빼앗아 전체주의 독재로 가는 길을 열었다고 본다.[2]
- 수정주의 해석: 1960~1970년대 서방의 사회사 연구자들은 노동자·병사·농민의 요구와 행동을 '아래로부터' 추적해, 볼셰비키가 1917년 가을 실제로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볼셰비키는 혁명을 만들어 냈다기보다 대중의 급진화를 등에 업었다는 것이다. 코르닐로프 사건 뒤 볼셰비키가 두 수도의 소비에트에서 다수가 되고, 제헌의회 선거에서 군인 표의 절반을 얻은 것이 그 근거로 꼽힌다.[17]
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는 '비밀 연설'에서 레닌의 집단 지도와 스탈린의 개인 숭배를 대비시켰고, 망명한 트로츠키는 스탈린 체제를 혁명의 배반으로 비판했다. 반대로 일당 독재와 테러는 레닌 시대에 이미 시작되었으며 제헌의회 해산과 크론시타트 진압이 그 증거라는 견해도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두만강 건너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은 1910년 국권 피탈 뒤 국외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이뤘다. 러시아 혁명 뒤 러시아와 중국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가들은 1918년 2월(양력 3월) 하바롭스크에서 조선인정치망명자회의를 열었고, "볼셰비키 주의에 찬동하여 고려혁명을 그 길로 촉진시키자"는 이동휘의 제안에 동조한 이들이 1918년 4월 28일(양력 5월 11일)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립했다. 위원장은 이동휘, 군사부장은 유동열, 선전부장은 김립이었다.[4]
한인사회당은 사관학교를 세워 100여 명 규모의 적위군을 만들었고, 이 부대는 칼미코프의 백군이 하바롭스크를 공격하자 적군 편에서 싸우다 졌다. 당은 1919년 4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제2차 당대회를 열어 코민테른 가입을 결의하고 박진순 등을 모스크바에 보냈다. 3·1 운동 뒤 대한국민의회와 상하이 임시정부가 통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서고 이동휘가 국무총리가 되자 당 본부도 상하이로 옮겼다.[4] 이동휘는 1920년 말 국무총리를 그만두고 임시정부를 떠난 뒤, 박진순과 한형권이 모스크바에서 받아 온 자금으로 공산당 조직에 힘썼다. 그러나 이르쿠츠크의 한인 공산주의자들과의 통합에 실패해, 1921년 5월 4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창립되자 5월 20일 한인사회당을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바꿨다.[4]
일본은 러시아 내전에 간섭하며 시베리아와 연해주에 군대를 보냈고, 1920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등 한인 거주지를 습격했다(4월 참변).[5]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 뒤 일본군의 대토벌을 피해 북만주로 옮긴 독립군 부대들은 대한독립군단으로 뭉쳐 1921년 초 러시아 땅으로 들어가 자유시(오늘날 스보보드니)에 모였다. 소비에트 쪽은 연해주를 점령한 일본군을 협상으로 내보내야 했으므로 독립군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일본의 압박을 무시할 수 없었고, 한인 부대 지휘권을 두고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맞섰다.[5]
1921년 6월 28일 적군 제29연대가 명령에 따르지 않은 사할린 의용대를 포위 공격해 무장해제했다. 이 사건을 자유시 참변(자유시사변, 흑하사변)이라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독립군 쪽 희생을 사망 272명, 익사 31명, 행방불명 205명, 포로 97명 등 600명이 넘는다고 적는 한편, 무장해제 뒤 포로가 된 사할린 의용대원을 864명으로 적는 다른 기록도 함께 소개한다. 사건 뒤 두 고려공산당의 분열은 되돌릴 수 없게 되었고, 만주 독립군은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았다.[5]
소련 정부가 황제 일가 전원의 죽음을 몇 해 뒤에야 인정하면서 황녀 아나스타샤 등이 살아남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1918년 이후 로마노프가의 자녀라고 주장한 사람은 200명이 넘었다. 가장 유명한 사람은 자신이 아나스타샤라고 주장한 애나 앤더슨으로, 많은 사람이 그 말을 믿었다.[8]
1970년대 말 지질학자 알렉산드르 압도닌이 찾아 비밀로 해 온 무덤이 1991년 공식 발굴되었고, 유골 아홉 구 가운데 황제, 황후, 세 딸이 영국 필립 공 등 친척과의 DNA 비교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알렉세이와 딸 한 명이 없어 생존설은 이어졌다. 2007년 여름 첫 무덤에서 약 70m 떨어진 곳에서 뼛조각 44점이 나왔고, 미국과 오스트리아 연구소의 DNA 분석으로 알렉세이와 그의 누이 한 명임이 밝혀졌다. 연구진은 이로써 일가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앤더슨은 첫 무덤 발견 뒤 DNA 검사로 가짜임이 드러났다.[8] 다만 2007년 무덤의 딸이 마리야인지 아나스타샤인지는 DNA로 가릴 수 없어, 러시아 학자들은 마리야, 미국 학자들은 아나스타샤라고 보는 등 의견이 갈린다.[8]
이 연구에서는 1891년 일본 오쓰에서 황태자 시절의 니콜라이가 일본 경찰관의 칼에 맞은 사건(오쓰 사건) 때 입었던 셔츠의 핏자국도 쓰였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보관된 이 셔츠에서 얻은 DNA가 첫 무덤의 황제 유골과 일치했다.[8]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장편소설 《닥터 지바고》(1957)는 1905년 혁명에서 제2차 세계 대전에 이르는 시기 러시아 지식인의 운명을 그렸다. 파스테르나크는 195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처음에는 받아들였으나 소련 당국의 압력으로 사양했다.[34]
-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1945)은 동물들이 농장주를 내쫓은 뒤 돼지 나폴레옹(스탈린)이 경쟁자 스노볼(트로츠키)을 쫓아내고 독재자가 되는 이야기로, 러시아 혁명과 그 뒤를 빗댄 우화다.
- 미국 기자 존 리드는 10월 혁명을 현장에서 지켜본 기록 《세계를 뒤흔든 열흘》(1919)을 썼다.[35]
| 제목 | 연도 | 감독 | 내용 |
|---|---|---|---|
| 전함 포템킨 | 1925 | 세르게이 에이젠시테인 | 1905년 혁명 때의 수병 반란. 1917년 혁명이 아니라 1905년 혁명을 다룬 영화다 |
| 10월(세계를 뒤흔든 열흘) | 1927 | 세르게이 에이젠시테인, 그리고리 알렉산드로프 | 10월 혁명 10주년 기념작. 7월 사태 때 시위대가 총격에 흩어지는 장면이 유명하다[12] |
|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 | 1965 | 데이비드 린 | 파스테르나크 원작. 아카데미 각색상(로버트 볼트), 음악상(모리스 자르), 촬영상 등 5개 부문 수상[36] |
| 레즈(Reds) | 1981 | 워런 비티 | 존 리드의 삶과 《세계를 뒤흔든 열흘》. 비티가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37] |
| 아나스타샤(Anastasia) | 1997 | 돈 블루스, 게리 골드먼 | 아나스타샤 생존 전설을 바탕으로 한 미국 애니메이션. 역사와는 거리가 먼 창작이다. 아카데미 주제가상·음악상 후보[38] |
에이젠시테인의 《전함 포템킨》은 1917년 혁명을 다룬 영화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지만, 1905년 흑해 함대 수병 반란을 그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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