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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第一次世界大戰, World War I, First World War)은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하면서 시작되어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휴전 협정에 서명할 때까지 유럽, 중동, 아프리카, 동아시아·태평양과 바다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영국·프랑스·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협상국(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오스만 제국·불가리아의 동맹국이 맞섰고, 이탈리아(1915년)와 미국(1917년)이 뒤에 협상국 편으로 들어왔다. 30개가 넘는 나라가 전쟁을 선포했고, 6,5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군대에 동원되었다.[1]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암살된 사건(사라예보 사건)이 발단이었다. 한 달 남짓한 외교 위기 끝에 동맹 관계로 묶인 열강이 줄줄이 참전했고, 독일이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하자 영국과 그 식민지·자치령까지 전쟁에 들어가 세계 전쟁이 되었다.[2] 서부 전선은 1914년 가을부터 참호선에 막혀 4년 가까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기관총·대포·독가스·전차·항공기 같은 공업화된 무기가 한꺼번에 쓰이면서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약 1,60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1]

전쟁 중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고, 끝난 뒤에는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오스만 제국·러시아의 네 제국이 무너졌다.[3]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베르사유 조약이 맺어지고 국제 연맹이 만들어졌으나, 패전국의 불만과 경제 혼란은 20년 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전후 처리 원칙으로 제시된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 조선의 3·1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전쟁 당시 영어권에서는 '대전쟁'(The Great War)이라고 불렀다. '세계 대전'이라는 말도 전쟁 중에 이미 쓰였고, 1939년 두 번째 세계 대전이 터진 뒤에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반적인 이름이 되었다. 독일어로는 Erster Weltkrieg, 프랑스어로는 Première Guerre mondiale 또는 그냥 Grande Guerre(대전쟁)라고 한다.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the war to end all wars)이라는 표현도 쓰였지만, 베르사유 조약 20년 뒤 더 큰 전쟁이 일어났다.[4]

교전 진영의 이름 '협상국'은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삼국 협상'에서, '동맹국'은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의 '삼국 동맹'에서 나왔다. 이탈리아는 삼국 동맹이 방어 동맹이라는 이유로 1914년에 참전하지 않았고, 1915년 오히려 협상국 편에 섰다.[2]

1871년 독일 통일로 중부 유럽에 강대국이 생기자 유럽의 세력 균형이 바뀌었다. 독일은 1879년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동맹을 맺었고, 1882년 이탈리아가 합류했다. 독일의 성장을 두려워한 러시아와 프랑스는 1893년 동맹을 맺었다. 영국은 오랫동안 프랑스·러시아를 잠재적 적으로 보았으나, 독일이 대규모 전함 함대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해군 군비 경쟁이 벌어지자 1904년부터 두 나라와 식민지 분쟁을 정리하는 협정을 맺었다. 독일은 이를 '포위'로 받아들였다. 모로코를 둘러싼 위기에서 영국이 프랑스를 지지하면서 두 진영의 골은 더 깊어졌다.[2] 영국과 프랑스·러시아의 관계는 동맹이 아니라 협상이어서, 영국에는 1914년 두 나라를 위해 싸울 조약상 의무가 없었다.[2]

발칸 반도와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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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 반도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물러나면서 생긴 빈자리를 두고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그리고 이 지역 신생 국가들이 다퉜다. 여러 민족이 섞여 사는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남슬라브 민족을 하나로 묶으려는 세르비아를 제국 안정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면서 두 나라 관계는 더 나빠졌고, 1912~1913년 발칸 전쟁을 거치며 세르비아는 영토와 영향력을 크게 늘렸다.[2]

군비 경쟁과 전쟁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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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유럽 강대국은 징병제로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했고, 전쟁이 나면 빨리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작전 계획을 세워 두었다. 1914년 여름 독일에는 전쟁 계획이 하나뿐이었다. 먼저 서쪽의 프랑스를 단기간에 쓰러뜨리고 나서 동쪽의 러시아로 돌아선다는 계획으로, 흔히 참모총장 알프레트 폰 슐리펜의 이름을 따 슐리펜 계획이라 부른다. 이 계획은 러시아가 동원을 마치기 전에 프랑스를 이기는 것이 전제였기 때문에 시간에 쫓겼고, 프랑스로 가는 길로 중립국 벨기에를 지나가야 했다.[2]

발발: 사라예보 사건과 7월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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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를 방문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부인 조피가 19세의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총에 맞아 숨졌다. 프린치프는 폭력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를 무너뜨리려던 젊은 암살 기도자 여러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가 배후에 있다고 의심했고, 이 기회에 세르비아의 위협을 없애려 했다.[2]

7월 5일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세르비아에 대한 강경 대응을 전폭 지지하겠다고 약속했고, 이를 믿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7월 23일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7월 24일부터 영국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가 국제 회의를 제안했으나 독일이 거절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했고, 러시아가 7월 30일 동원을 명령하자 독일은 7월 31일 동원 해제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낸 뒤 8월 1일 러시아에, 8월 3일 프랑스에 선전 포고했다. 8월 2일 벨기에가 독일군의 통과 요구를 거부하자 독일군은 벨기에를 침공했고, 영국은 8월 4일 오후 2시 철수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낸 뒤 밤 11시 시한이 지나자 전쟁에 들어갔다.[2]

세르비아는 최후통첩 조항 가운데 암살 수사에 오스트리아-헝가리 관리를 참여시키라는 요구만 빼고 모두 받아들였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 답을 거부했다. 러시아의 동원은 러시아 쪽에서는 예방 조치였으나, 러시아가 준비를 마치기 전에 프랑스를 쳐야 하는 독일에게는 공격 행위로 보였다. 독일 수상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는 벨기에 중립을 보장한 1839년 조약을 '종잇조각'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독일이 벨기에 중립을 깨면서 영국의 참전은 '작은 나라의 권리'를 지키는 도덕 문제가 되었다.[2]

아래 표의 날짜와 출처는 본문 각 절의 각주를 따른다.

날짜 사건
1914년 9월 6~10일 마른 전투. 프랑스·영국군의 반격으로 독일군 후퇴
1914년 11월 일본군, 칭다오의 독일 조차지 점령
1914년 11월 오스만 제국, 동맹국 편으로 참전
1915년 1월 18일 일본, 중국 위안스카이 정부에 21개조 요구 제출
1915년 4월 25일 연합군, 갈리폴리반도 상륙(갈리폴리 전투)
1915년 5월 7일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 독일 잠수함에 격침. 미국인 128명 사망
1915년 봄~1916년 가을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1916년 2월 21일 베르됭 전투 시작(12월까지)
1916년 5월 31일~6월 1일 유틀란트 해전. 영국·독일 주력 함대의 유일한 정면 대결
1916년 7월 1일 솜 전투 시작(11월 18일까지)
1917년 2월 1일 독일, 무제한 잠수함 작전 재개
1917년 3월 러시아 2월 혁명(러시아 구력 2월). 차르 니콜라이 2세 퇴위
1917년 4월 6일 미국, 독일에 선전 포고
1917년 11월 러시아 10월 혁명(러시아 구력 10월). 볼셰비키 집권
1918년 1월 8일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14개조 평화 원칙 발표
1918년 3월 3일 소비에트 러시아와 동맹국,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1918년 8월 8일 연합군의 백일 공세 시작(11월 11일까지)
1918년 11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휴전. 같은 날 독일 킬 군항에서 수병 반란
1918년 11월 11일 콩피에뉴 숲의 열차 객차에서 독일이 휴전 협정 서명. 오전 11시 발효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베르사유 조약 서명
1920년 1월 국제 연맹 출범

독일군은 1914년 8월 벨기에를 지나 프랑스 북부로 밀고 들어갔으나, 9월 6~10일 마른 전투에서 프랑스·영국군의 반격을 받고 물러났다. 독일은 동쪽에서 이기고 서쪽에서 진 셈이 되어 단기전 계획이 무너졌고, 전쟁은 여러 전선에서 오래 이어지게 되었다. 1914년 한 해 동안 모든 전선의 손실이 500만 명을 넘었고 그중 100만 명이 죽었다.[5]

엄청난 손실을 본 양군은 땅을 파고 들어갔다. 1914년 말에는 영국 해협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참호선이 이어졌다. 영국 국립육군박물관은 그 길이를 600km 남짓으로, 제국전쟁박물관은 프랑스·벨기에 쪽 참호망을 402km(250마일)로 적는다.[3][6] 이후 양쪽은 오랜 포격, 대규모 보병 돌격, 독가스, 전차 같은 수단으로 참호선을 뚫으려 했지만 수십만 명의 목숨을 쓰고도 전선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6]

  • 베르됭 전투(1916년 2월 21일~12월): 독일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프랑스군을 소모시키려고 기획한 공세로, 근대 역사에서 가장 긴 전투가 되었다. 제국전쟁박물관의 베르됭 문서는 프랑스군 37만 7천 명, 독일군 33만 명의 손실로 적고, 같은 박물관의 주요 전투 문서는 독일군 43만여 명, 프랑스군 약 55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적어 집계 기준에 따라 차이가 크다.[7][5]
  • 솜 전투(1916년 7월 1일~11월 18일): 베르됭의 프랑스군을 돕기 위해 영국군이 주도한 공세다. 첫날에만 영국군 1만 9,240명이 죽고 사상자가 5만 7천 명을 넘어 영국 군사사에서 가장 피를 많이 흘린 날로 남았다. 141일 동안 영국군은 최대 11km(7마일)를 전진했고, 모든 교전국을 합쳐 100만 명이 넘게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가 되었다.[8]

1917년 독일군은 방어에 유리한 힌덴부르크선으로 물러났다. 프랑스의 니벨 공세는 실패했고 뒤이어 프랑스군 일부가 공공연히 명령을 거부했다. 영국군의 제3차 이프르 전투(파스샹달 전투)는 비 때문에 진창 속 소모전이 되었다.[6] 1918년 3월 러시아와 강화한 독일이 동부의 병력을 돌려 마지막 대공세를 폈다. 짧은 포격과 침투 전술로 큰 땅을 얻었지만 보급이 따르지 못했고, 4월 10일까지 30만 명이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가 되었다.[9] 이어 8월 8일부터 미군의 지원을 받은 연합군의 백일 공세가 독일군을 1914년의 전장까지 밀어냈다.[6]

동부 전선과 러시아의 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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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전선은 서부 전선보다 훨씬 넓어 기동전 양상이 더 강했다. 1914년 8월 동프로이센에 들어간 러시아군은 타넨베르크에서 독일군에 크게 졌다.[5] 1915년 동맹국 공세로 러시아는 폴란드 지역을 잃었다. 1916년 6월 4일 시작된 브루실로프 공세는 짧고 강한 포격과 돌격 부대로 약점을 파고드는 전술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러시아군의 가장 성공한 공세였지만 마지막 대공세이기도 했고,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모두 군사·정치적으로 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5]

전쟁의 부담으로 러시아에서는 1917년 3월(러시아 구력 2월) 혁명이 일어나 차르 정부가 무너졌다. 임시 정부는 전쟁을 계속했으나, 11월(구력 10월)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고 곧 휴전에 들어갔다. 1918년 3월 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맺은 강화 조약으로 소비에트 러시아는 전쟁에서 빠졌다.[10]

발칸·이탈리아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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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는 1914년 세르비아를 침공했으나 거듭 밀려났다. 1915년 10월 불가리아가 동맹국 편으로 참전하고 독일군이 합세하면서 세르비아는 점령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그리스 북부에 병력을 보내 불가리아와 싸웠다.[3] 1918년 9월 이 마케도니아 전선이 뚫리자 불가리아가 가장 먼저 항복했다.[9]

1915년 5월 협상국 편으로 참전한 이탈리아는 알프스 산악 지대와 이손초강 일대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소모전을 벌였다. 1917년 가을 카포레토 전투에서 크게 지자 영국과 프랑스가 병력을 보내 이탈리아군을 도왔다.[3]

오스만 제국과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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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은 1914년 11월 동맹국 편으로 참전했다. 중동은 이 전쟁에서 가장 넓은 전역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메소포타미아(오늘날 이라크), 갈리폴리, 시나이·팔레스타인, 페르시아에서 오스만군과 싸웠고, 러시아는 캅카스에서 오스만군과 싸웠다.[3]

  • 갈리폴리 전투(1915년 4월 25일~1916년 1월 9일): 다르다넬스 해협을 뚫고 콘스탄티노폴리스(오늘날 이스탄불)를 점령해 오스만 제국을 전쟁에서 몰아내려던 연합군의 상륙 작전이었으나 오스만군에 막혀 실패하고 철수했다.[5] 오스트레일리아군만 사상자 2만 6,111명, 그중 사망자 8,141명을 냈다.[11] 이 전투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국가 정체성을 이루는 사건이 되었고, 오스만 쪽에서 이름을 떨친 무스타파 케말(뒤의 아타튀르크)은 튀르키예 공화국을 세웠다.[5]
  • 메소포타미아: 인도군이 주력이었다. 유전을 빨리 확보한 뒤 바그다드로 무리하게 진격하다가 1916년 4월 쿠트에서 수비대가 항복했으나, 재편 후 1917년 3월 11일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전쟁 끝 무렵 모술까지 들어갔다.[12]
  • 시나이·팔레스타인: 오스만군은 1915년 2월 수에즈 운하를 공격했으나 인도군 등에 막혔다.[12] 1916년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이 오스만에 맞서 아랍 반란을 일으켰고, 영국군은 1917년 12월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전쟁 중 오스만 정부는 제국 안의 아르메니아인을 강제 이주시키고 학살했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에 따르면 1915년 봄부터 1916년 가을 사이 약 1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 가운데 적어도 66만 4천 명, 많게는 120만 명이 학살, 학대, 노출, 기아로 죽었다.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불리기도 한다.[13]

1916년 영국과 프랑스가 비밀리에 맺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은 아랍 국가의 독립을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역을 두 나라의 직접 통치 구역과 영향권으로 나누었다.[14] 영국은 1917년 11월 2일 밸푸어 선언으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향토'를 세우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혔다.[15]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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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동맹국인 영국이 독일과 전쟁에 들어간 것을 구실로 1914년 8월 독일에 선전 포고하고, 독일령 남양 군도와 중국 산둥반도의 독일 조차지를 점령했다.[16] 1914년 11월 일본군은 칭다오(青島) 성내로 들어갔다.[17]

1915년 1월 18일 일본은 위안스카이 정부에 5개 항목의 비밀 요구, 이른바 21개조 요구를 내밀었다. 산둥과 남만주·동부 내몽골에서 일본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하라는 요구, 그리고 중국 정부에 일본인 고문을 두게 하는 제5호가 들어 있었다. 일본은 제5호를 뺀 최후통첩을 보냈고 위안스카이는 5월 9일 이를 받아들였으며, 조약은 5월 25일 서명되었다. 위안스카이는 5월 9일을 국치일로 정했다.[18]

1917년 러시아 혁명 뒤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과 미국에 시베리아 출병을 요청했다. 미국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일·미 공동 출병을 결정하자 일본도 1918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병력을 보냈다.[19] 출병을 앞두고 쌀 투기로 쌀값이 치솟자 1918년 7월 도야마에서 시작된 쌀 소동이 전국으로 번졌고, 데라우치 내각이 물러난 뒤 9월 29일 하라 다카시가 첫 본격 정당 내각을 꾸렸다.[20][21]

영국령 인도도 대군을 보냈다. 1914년 10월 무너지기 직전이던 영국 원정군을 4만 5천 명의 인도 원정군이 받쳐 서부 전선을 지켰고, 1914년 말 서부 전선 영국군의 3분의 1이 인도군이었다.[12]

아프리카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 식민지를 차례로 점령했고, 동아프리카에서는 독일군이 게릴라전으로 전쟁 끝까지 버텼다.[3]

영국 해군은 개전 직후부터 독일을 해상 봉쇄했다. 1916년 5월 31일~6월 1일 유틀란트 해전은 영국과 독일의 드레드노트급 전함 함대가 맞붙은 유일한 해전으로, 함선 250척과 약 10만 명이 참가했다. 영국은 함선 14척과 6천여 명, 독일은 11척과 2,500여 명을 잃었다. 승부는 나지 않았지만 독일 함대는 이후 북해에서 영국의 제해권에 다시 도전하지 못했고, 봉쇄는 1918년 독일 패배의 한 원인이 되었다.[5]

독일은 봉쇄에 맞서 잠수함(U보트)으로 영국으로 가는 배를 공격했다. 1915년 5월 7일 루시타니아호 격침으로 미국인 128명이 죽자 미국의 압력에 독일은 잠수함 작전을 늦췄다.[22]

항공기는 처음에 정찰용이었으나 곧 공중전, 지상 공격, 전략 폭격으로 쓰임이 넓어졌다.[3]

미국은 개전 때 중립을 선언했고, 윌슨 대통령은 국민에게 '말과 생각에서도' 중립을 지키라고 당부했다.[22] 1916년 서식스호 격침 뒤 독일은 5월 4일 잠수함 작전을 제한하겠다고 약속했으나, 1917년 2월 1일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했다.[23]

같은 시기 독일 외무장관 아르투어 치머만은 멕시코 주재 공사에게, 미국과 전쟁이 나면 멕시코가 독일과 동맹을 맺는 대가로 텍사스·뉴멕시코·애리조나를 되찾게 해 주겠다는 전보를 보냈다. 영국 해군 정보부가 1917년 1월 이 전보를 가로채 해독했고, 2월 24일 윌슨에게 넘겼으며, 3월 1일 미국 언론에 보도되었다.[24][23] 윌슨은 4월 2일 의회에 선전 포고를 요청했고, 미국은 4월 6일 독일에 선전 포고했다. 미국은 '연합국'(Allied)이 아니라 '협력국'(Associated Power)이라는 지위로 참전했다.[22]

1918년 9월 29일 루덴도르프가 휴전을 구해야 한다고 판단한 뒤 독일 정부는 10월 4일 윌슨에게 14개조를 바탕으로 한 휴전 중재를 요청했다.[25][4] 9월 불가리아, 10월 오스만 제국, 11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차례로 전쟁에서 빠졌고, 같은 날 마지막 출격 명령을 받은 독일 해군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독일 전역으로 번졌다.[9]

11월 9일 빌헬름 2세가 퇴위하고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튿날 새 정부 대표단이 파리 북동쪽 콩피에뉴 숲의 열차 객차에서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를 만났고, 11월 11일 오전 5시 휴전 조건에 동의했다. 휴전은 그날 오전 11시에 발효되었다.[4] 조건은 독일군의 프랑스·벨기에 철수와 무기·항공기·군함·잠수함 인도를 담고 있어 사실상 항복이었다.[25]

파리 강화 회의와 베르사유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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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월부터 1920년 1월까지 파리에서 열린 강화 회의는 패전국마다 따로 조약을 만들었다. 조건은 승전국이 정했고 패전국은 협상에 참여하지 못했다.[4] 회의는 영국·프랑스·미국·이탈리아의 '4대국'이 이끌었고,[26] 일본도 5대국의 하나로 참여했다.[27]

독일과 맺은 베르사유 조약은 사라예보 암살 사건 정확히 5년 뒤인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서명되었다. 독일은 육군을 크게 줄이고, 해군과 공군을 넘기고, 함선·전차·항공기를 만들지 못하게 되었으며,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돌려주는 등 넓은 영토를 잃었다.[4] 제231조는 연합국이 입은 모든 손실과 피해가 '독일과 그 동맹국의 침략으로 강요된 전쟁'의 결과이며 그 책임이 독일과 동맹국에 있다고 규정했다.[28] 흔히 '전쟁 책임 조항'으로 불린다. 배상액은 1921년 연합국 배상위원회가 1,320억 금마르크(당시 약 320억 달러)로 정했다.[26]

오스트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오스만 제국과도 각각 조약(생제르맹, 트리아농, 뇌이, 세브르 조약)이 맺어졌다. 오스만 제국과 맺은 세브르 조약은 튀르키예 독립 전쟁으로 무효가 되었고, 1923년 로잔 조약으로 대체되었다.

일본은 강화 회의에서 적도 이북의 독일령 태평양 섬들과 산둥의 독일 권익을 넘겨받고, 국제 연맹 규약에 인종 차별 철폐 조항을 넣으라고 요구했다.[27] 산둥 권익이 일본에 넘어간다는 결정에 반발해 중국에서 5·4 운동이 일어났다.

윌슨은 14개조의 마지막 조항으로 크고 작은 나라의 정치적 독립과 영토 보전을 보장하는 국가 연합체를 제안했다.[29] 국제 연맹 규약은 베르사유 조약 제1편으로 들어갔고, 연맹은 1920년 1월 출범해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두었다.[4][30] 그러나 미국 상원은 1920년 3월 19일 조약 비준안을 부결했고, 미국은 끝내 연맹에 가입하지 않았다.[26][30]

사상자 수는 자료마다 크게 다르다. 민간인 사망은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고, 기근·질병·학살 사망을 어디까지 넣느냐에 따라 숫자가 달라진다.

  • 영국 제국전쟁박물관: 군인과 민간인 약 1,600만 명 사망[1]
  • 영국 국립육군박물관: 전 세계 군인 1,000만 명 이상 사망[3]
  • CVCE(룩셈부르크의 유럽 통합 연구 기관) 집계: 군인 약 972만 명, 민간인 약 682만 명, 합계 약 1,654만 명 사망, 군인 부상 약 2,123만 명. 같은 자료의 개요는 민간인 사망을 약 1,000만 명, 전체 사망을 약 2,000만 명으로 어림하기도 한다. 스페인 독감 사망은 가능한 한 빼고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넣은 수치다.[31]
나라 군인 사망 민간인 사망 인구 대비 사망률
독일 제국 2,050,897 426,000 3.82%
러시아 제국 1,811,000 1,500,000 1.89%
프랑스 1,397,800 300,000 4.29%
오스트리아-헝가리 1,100,000 467,000 3.05%
영국(본국) 885,138 109,000 2.19%
오스만 제국 771,844 2,150,000 13.72%
이탈리아 651,000 589,000 3.48%
세르비아 275,000 450,000 16.11%
루마니아 250,000 430,000 9.07%
미국 116,708 757 0.13%
일본 415 - 0%

위 표는 CVCE 집계를 옮긴 것이다.[31] 영국 제국 전체로는 제국전쟁박물관이 사망자 약 100만 명, 부상자는 그 두 배가 넘는다고 적는다.[4]

후방도 피해를 입었다. 독일에서는 연합국의 봉쇄로 식량 위기가 닥쳐 1918년까지 영양실조로 죽은 민간인이 70만 명에 이른다는 추정이 있다.[9]

전쟁 막바지인 1918년 스페인 독감(H1N1 인플루엔자)이 세계로 퍼졌다. 미국에서는 1918년 봄 군인들 사이에서 처음 확인되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세계 인구의 3분의 1인 약 5억 명이 감염되고 적어도 5,000만 명이 죽었다고 추정하며, 20~40세 건강한 성인의 사망률이 높았던 것을 이 범유행의 특징으로 든다.[32] 이름과 달리 스페인에서 시작된 병이 아니다. 중립국 스페인은 교전국과 달리 나쁜 소식을 검열하지 않아 유행 소식이 널리 알려졌을 뿐이다.[33] 사망자 추정은 연구에 따라 2,000만 명에서 1억 명 이상까지 벌어진다.[34][33] 독일에서는 봄의 1차 유행이 춘계 공세에 타격을 주었고, 가을의 더 치명적인 2차 유행은 연합군이 승기를 잡던 때와 겹쳤다.[9]

제국의 해체와 새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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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러시아의 네 제국이 무너졌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이어져 온 유럽 질서가 끝났다.[3] 유럽과 중동에는 새 국가가 생겼으나 이것이 다음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4] 폴란드가 독립을 되찾고 핀란드·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 등이 러시아에서 떨어져 나왔으며, 러시아 내전과 그리스·튀르키예 전쟁처럼 1918년 뒤에도 전쟁이 이어졌다.[35]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역은 국제 연맹 위임 통치라는 이름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나눠 맡았다.

전쟁은 미국을 세계 강국으로 끌어올렸다.[4] 총력전은 여성의 사회 참여도 넓혔다. 영국에서는 1918년 국민대표법으로 21세 이상 남성과 30세 이상 일부 여성이 투표권을 얻었다.[4]

패전국 독일에서는 군 수뇌부의 책임이 새 공화국 정부에 떠넘겨졌다.[25] 베르사유 조약 제231조와 배상 부담에 대한 반감과 경제난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초 나치당이 세력을 키우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4] 1929년 대공황이 겹치면서 전후 질서는 무너져 갔고,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전쟁 방식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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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총, 대구경 포, 독가스, 전차, 항공기, 잠수함이 처음으로 대량 투입되었다. 1915년 4월 이프르에서 독일군이 염소 가스를 쓴 뒤 양쪽 모두 가스를 썼고, 1916년부터는 가스를 포탄에 담아 쏘았다.[36] 영국이 개발한 전차는 1916년 9월 15일 처음 실전에 나왔고 1918년 중반에는 영국군의 표준 장비가 되었다.[37]

베르사유 조약 제231조는 전쟁 책임을 독일과 그 동맹국에 돌렸다.[28] 역사학계에서 이 문제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1961년 독일 역사학자 프리츠 피셔는 《세계 강국을 향한 질주》(Griff nach der Weltmacht)에서 독일 지도부가 공격적인 전쟁 목표를 품고 있었고 전쟁의 주된 책임이 독일에 있다고 주장해 서독에서 큰 논쟁을 불렀다. 반대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몽유병자들》(The Sleepwalkers, 2012)처럼 1914년 7월 여러 열강의 오판과 상호 작용을 강조해 책임을 넓게 나누는 연구도 있다. 피셔 쪽 연구자들은 이런 해석이 독일의 의도와 물질적 동기를 가볍게 본다고 비판한다.[38]

'당나귀가 이끈 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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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는 용감한 병사들이 더글러스 헤이그 같은 무능한 장군 때문에 헛되이 죽었다는 '당나귀가 이끈 사자들'(lions led by donkeys)이라는 표현이 오래 쓰였다. 제국전쟁박물관은 현대 역사가들이 이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고 소개한다.[6] 솜 전투도 1970년대 이후 학계에서는 첫날의 참사만이 아니라 141일 동안 영국군이 전술을 배워 가며 1918년 승리의 바탕을 쌓은 과정으로 다시 보는 견해가 나왔다.[8]

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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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륙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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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났을 때 한반도는 1910년 경술국치 뒤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 있었다. 일본은 유럽 열강이 아시아에 신경 쓸 수 없는 틈을 타 칭다오와 남양 군도를 점령하고 21개조 요구로 만주·산둥 등에서 세력을 넓혔다.[16]

민족자결주의와 3·1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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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월 윌슨은 14개조에서 피압박 민족의 자결을 전후 처리 원칙으로 내세웠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에 따르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이 가진 식민지를 처리하기 위한 원칙이어서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인 한국에는 처음부터 적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3·1 운동을 추진한 민족 대표들도 이 점을 알았지만 독립운동에 유리한 조건으로 이용하려 했다.[16]

1918년 11월 말 전쟁이 끝나자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은 새 국제 질서 속에서 한국 독립 문제가 다뤄질 것을 기대하고, 김규식·여운형·신규식·신채호 등이 참여한 신한청년당(신한청년단)을 조직했다. 1918년 12월 15일께 윌슨이 중국 정부에 보낸 특사 크레인(Charles R. Cra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표기 '클레인')이 상하이에서 다가오는 파리 강화 회의가 약소민족 해방의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연설했다. 신한청년당은 외교에 능한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 대표로 보내고, 여운형을 러시아령으로, 장덕수를 일본으로, 선우혁 등을 국내로 보내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장덕수는 일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촉진했고, 국내로 들어간 선우혁은 관서 지방 기독교인들과 손잡고 3·1 운동의 분위기를 만들었다.[39]

김규식은 1919년 2월 1일 상하이를 떠나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해 '파리한국통신부'를 세웠다. 4월 13일 상하이 임시의정원은 그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 겸 파리 강화 회의 대표로 임명했다. 파리한국통신부는 5월 12일 「한국 민족의 주장」(The Claim of the Korean People and Nation)을 영어·프랑스어로 찍어 클레망소와 로이드 조지 등 각국 대표에게 보냈으나, 강화 회의 참가국은 반응하지 않았다.[40]

스페인 독감은 1918년 9월께 남만주철도를 타고 한반도 북부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3월 조선총독부가 집계한 바로는 1918년 추정 인구 1,705만 7,032명 가운데 755만 6,693명이 걸리고 14만 527명이 죽었다. 실제 환자와 사망자는 이보다 많았을 것으로 본다.[34]

크리스마스 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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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크리스마스이브 밤, 서부 전선의 영국 원정군 병사들은 맞은편 독일군 참호에서 캐럴과 노래가 들리고 참호를 따라 등불과 작은 전나무가 놓인 것을 보았다. 이튿날 양쪽 병사들이 무인 지대에서 만나 선물을 주고받고 사진을 찍었으며, 일부는 즉석에서 축구를 했다. 전사자를 묻고 참호를 고치기도 했다. 휴전은 전선 전체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어서 다른 곳에서는 크리스마스에도 전투가 이어져 사상자가 났고, 일부 장교는 사기가 떨어질까 걱정했다.[41]

이 휴전은 당시에도 지어낸 이야기로 의심받았지만 1915년 1월 초 병사들의 편지와 사진이 신문에 실리면서 확인되었다. 축구는 팀을 짠 시합이 아니라 공을 차고 노는 정도였다는 증언이 있다. 1914년 이후 양군 수뇌부는 비슷한 휴전을 막으려 했고, 이만한 규모의 휴전은 다시 없었다. 다만 조용한 구역에서는 서로 공격을 자제하는 '살고 살게 하기'(live and let live) 관행이 이어졌다.[41]

그 밖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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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에 동원된 동물은 1,600만 마리가 넘었다. 말·당나귀·노새·낙타가 식량과 탄약을 나르고, 개와 비둘기가 소식을 전했다.[42]
  • 《호빗》과 《반지의 제왕》의 작가 J. R. R. 톨킨은 1916년 여름과 가을 솜 전선의 참호에서 대대 통신 장교로 복무하다가 참호열에 걸려 후송되었다. 이 경험이 그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43]
  • 《서부 전선 이상 없다》(Im Westen nichts Neues): 서부 전선에서 싸운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가 쓴 소설로, 1929년 세계적 성공을 거두었다. 병사의 '영웅적 죽음'이라는 금기를 깼다는 평가를 받으며 독일에서 큰 논란을 불렀고, 1933년 나치의 분서 때 공공 도서관에서 치워졌다.[44]
  •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로 이탈리아 전선을 배경으로 한다. 1932년과 1957년 영화로 만들어졌다.[45]
제목 연도 감독 내용
서부 전선 이상 없다 1930 루이스 마일스톤 레마르크 원작의 미국 영화[46]
영광의 길(Paths of Glory) 1957 스탠리 큐브릭 프랑스군의 무모한 공격과 군사 재판[47]
아라비아의 로렌스 1962 데이비드 린 아랍 반란에 참여한 영국 장교 T. E. 로렌스[48]
메리 크리스마스(Joyeux Noël) 2005 크리스티앙 카리옹 1914년 크리스마스 휴전[49]
워 호스 2011 스티븐 스필버그 서부 전선에 징발된 말과 소년[50]
1917 2019 샘 멘데스 공격 중지 명령을 전하러 적진을 가로지르는 영국군 병사 두 명[51]
서부 전선 이상 없다 2022 에드바르트 베르거 독일 영화. 제95회 아카데미상 9개 부문 후보에 올라 국제 장편 영화상 등 4개 부문 수상[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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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2.0 2.1 2.2 2.3 2.4 2.5 2.6 2.7 2.8 Outbreak of the First World War, IWM, 2026-10-16 확인.
  3. ↑ 3.0 3.1 3.2 3.3 3.4 3.5 3.6 3.7 3.8 First World War, 영국 국립육군박물관, 2026-10-16 확인.
  4. ↑ 4.00 4.01 4.02 4.03 4.04 4.05 4.06 4.07 4.08 4.09 4.10 How We Made the Peace, IWM, 2026-10-16 확인.
  5. ↑ 5.0 5.1 5.2 5.3 5.4 5.5 5.6 First World War key battles, IWM, 2026-10-16 확인.
  6. ↑ 6.0 6.1 6.2 6.3 6.4 Western Front, IWM, 2026-10-16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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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8.0 8.1 Battle of the Somme, IWM, 2026-10-16 확인.
  9. ↑ 9.0 9.1 9.2 9.3 9.4 Germany in the First World War, IWM, 2026-10-16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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