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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武王, ?~737, 재위 719~737)은 발해의 제2대 왕으로, 이름은 대무예(大武藝)이며 인안(仁安)이라는 독자 연호를 쓰고 영토를 넓혔으며, 732년 장문휴를 보내 당의 산둥반도 등주를 공격했다.

고왕 대조영의 아들로 719년 왕위에 올랐다. 즉위하자 인안이라는 연호를 세워 발해가 당과 대등한 나라임을 드러냈다. 동북방의 여러 말갈 세력을 정복해 영토를 크게 넓혔고, 당과 신라를 견제하려고 일본과 국교를 열었다. 무왕 때의 대외 강경책과 대당 전쟁은 발해 내부의 결속과 왕권 강화로 이어져, 아들 문왕 때 체제 정비의 바탕이 되었다.[1]

  • 흑수말갈 문제 - 당이 발해에 알리지 않고 흑수말갈 추장을 흑수 도독으로 삼고 흑수군을 두어 발해를 앞뒤에서 견제하려 하자, 무왕은 726년 동생 대문예에게 흑수말갈을 치게 했다. 대문예가 반대하다 당으로 망명하면서 발해와 당의 갈등이 깊어졌다.
  • 일본과의 국교(727) - 신라와 당을 견제하려고 일본에 처음 사신을 보냈다.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고 부여의 풍속을 이었다고 밝혔다.
  • 등주 공격 - 장문휴에게 수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당의 등주(지금의 산둥반도)를 치게 해 자사 위준을 죽였다. 백과사전은 이를 732년 9월의 일로 적고, 『삼국사기』는 성덕왕 32년(733) 7월 기사에서 발해가 바다를 건너 등주를 쳤다고 적어 연도가 1년 엇갈린다.[1][2]
  • 나당의 반격 - 당은 신라에 발해의 남쪽을 치게 했으나, 733년 겨울 신라군은 큰 추위와 눈으로 군사의 절반 이상을 잃고 돌아왔다. 발해군은 거란·돌궐과 함께 요서의 마도산까지 공격했다. 이후 반당 연대가 흩어지자 발해는 당과 관계를 회복했다.

발해 왕들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실 왕 연호
동모산에서 발해 건국(698) 고왕 대조영 천통(후대 기록)
장문휴의 등주 공격, 일본과 국교, 말갈 정복 무왕 인안
3성 6부·주자감 정비, 신라도 개설, 상경 천도 문왕 대흥
5경 15부 62주, '해동성국' 선왕 건흥

나라 밖에서는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영락), 신라의 법흥왕(건원), 고려의 광종(광덕·준풍)이 독자 연호를 썼다(→ 한국의 연호).

  1. ↑ 1.0 1.1 무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 성덕왕 32년 당나라 현종이 발해 공격을 요청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