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미 증식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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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미 증식 계획(産米增殖計劃)은 일제가 자국의 쌀 부족을 메우려고 1920년부터 한반도에서 쌀 생산을 늘리고 그보다 많은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게 한 식민지 농업 정책으로, 1934년 중단되었다가 1940년 전시 식량 확보를 위해 다시 추진되었다.
- 두 갈래 - 저수지·수리 시설을 만들고 밭을 논으로 바꾸거나 간척·개간으로 논을 늘리는 토지 개량과, 일본 품종 보급·비료 사용·깊이갈이 등으로 단위 면적당 수확을 늘리는 농사 개량으로 나뉘었다.
- 수리 조합 - 토지 개량은 지주들이 만든 수리 조합이 맡았다. 토지 개량 자금과 보조금의 대부분이 수리 조합에 몰렸다.
- 제1차 계획 - 토지 42만 7,500정보를 개량해 쌀 약 900만 석을 늘리고 그 가운데 약 460만 석을 일본으로 보낸다는 목표였다. 1925년까지 착수한 면적은 계획의 59% 정도에 그쳤다.
- 갱신 계획(1926~) - 정부가 알선하는 싼 이자의 자금 비중을 크게 높이고 조선 토지 개량 주식회사를 세워 다시 밀어붙였다.[1]
- 중단(1934) - 대공황으로 쌀값이 떨어지고 자금이 줄어 수리 조합 경영이 나빠진 데다, 조선 쌀이 들어와 쌀값이 떨어진다는 일본 농민의 반발이 겹쳐 1934년 중단되었다.
- 제3차 계획(1940) - 중일 전쟁 뒤 군량미가 필요해지자 1940년 다시 세웠다.
계획 기간은 자료마다 다르게 정리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제1차를 1921~1925년의 5개년, 제2차를 1926~1935년의 10개년 계획으로 보고,[2] 『신편 한국사』는 1920년에 15개년 계획으로 시작한 제1기 사업과 1926년부터의 12개년 갱신 계획으로 설명한다.[1]
- 증산보다 많은 반출 - 쌀 생산은 어느 정도 늘었지만 일본으로 실어 간 양은 그보다 더 빨리 늘어, 한국인 한 사람이 먹는 쌀은 오히려 줄었다. 부족한 식량은 만주에서 들여온 조·수수 등 잡곡으로 메웠다.
- 농민 몰락 - 수리 조합비와 비료 대금, 품종 개량 비용이 소작농과 중소 지주에게 떠넘겨져, 땅을 잃고 소작농이 되거나 고향을 떠나는 농민이 늘었다. 이런 부담은 1920년대 소작 쟁의의 배경이 되었다(→ 암태도 소작 쟁의).
- 쌀 단작화 - 논농사 비중이 지나치게 커져 농업 구조가 쌀 중심으로 치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