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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통치(文化統治, 1919~1930년대 초)는 3.1 운동 뒤 일제가 헌병 경찰 통치를 보통 경찰 통치로 바꾸고 언론·결사를 일부 허용하는 등 유화책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감시를 늘리고 친일 세력을 길러 민족을 분열시키려 한 식민 통치 방식이다.

문화 통치를 내세운 총독 사이토 마코토(1906년 무렵)

3.1 운동으로 무단 통치의 한계가 드러나자, 일본 총리 하라 다카시는 조선을 일본 본토의 연장으로 보고 같은 제도를 점차 시행한다는 '내지 연장주의'를 내세웠다. 1919년 새로 부임한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이를 '문화 정치'라는 이름으로 펼쳤다. 그러나 독립이나 자치를 허용한 것은 아니었고, 회유와 분열로 식민 지배를 더 교묘하게 굳히려는 정책이었다.[1]

내세운 정책과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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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운 정책 실상
문관도 총독에 임명할 수 있게 함 광복 때까지 문관 총독은 한 명도 임명되지 않음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꿈 경찰 관서·인원·예산이 오히려 크게 늘어남
한국인의 신문 발행 허가(1920년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 검열·기사 삭제·압수·정간을 되풀이함
집회·결사 일부 허용 1925년 치안 유지법으로 사회주의·독립운동을 탄압함
제2차 조선 교육령(1922)으로 보통학교 6년, 대학 설립 허용 학교 수가 적어 취학률이 낮았고, 대학은 관립 경성 제국 대학(1924)만 세움 (→ 민립 대학 설립 운동)
도 평의회·부 협의회·면 협의회 설치 의결권 없는 자문 기구로, 친일 인사가 주로 참여함
조선 태형령 폐지(1920) 한편으로 친일 단체와 친일 인사를 길러 민족 운동을 분열시킴
  • 회사령 폐지(1920) - 회사 설립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어 일본 자본이 쉽게 들어오게 했다.
  • 산미 증식 계획(1920~1934) - 일본의 쌀 부족을 메우려 한반도의 쌀 생산을 늘리게 했다. 늘어난 양보다 더 많은 쌀이 일본으로 빠져나가 한국인의 쌀 소비량이 줄었고, 수리 조합비와 비료 대금이 농민에게 떠넘겨졌다. 이 부담은 암태도 소작 쟁의 같은 소작 쟁의의 배경이 되었다.
  • 관세 철폐(1923) - 일본 상품에 대한 관세를 대부분 없애 일본 상품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에 맞서 물산 장려 운동이 일어났다.

이 시기의 민족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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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된 활동 공간 속에서 실력 양성 운동(물산 장려 운동, 민립 대학 설립 운동)과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노동·농민 운동(조선 노농 총동맹), 청년·여성 운동(조선 여성 동우회, 근우회), 형평 운동, 소년 운동이 활발했다. 한편 일부 민족주의자는 일제의 지배를 인정한 채 자치를 주장했다. 이에 맞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1927년 신간회를 세웠다. 학생들은 6.10 만세 운동(1926)과 광주 학생 항일 운동(1929)을 일으켰다.

식민 통치 방식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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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통치 방식 대표 정책
1910~1919 무단 통치 헌병 경찰제, 조선 태형령, 토지 조사 사업, 회사령, 조선 물산 공진회(1915)
1919~1930년대 초 문화 통치 보통 경찰제, 한글 신문 허가, 산미 증식 계획, 치안 유지법, 제2차 조선 교육령
1930년대 후반~1945 민족 말살 통치 황국 신민 서사, 창씨개명, 국가 총동원법,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1941)
  1. ↑ 내지연장주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