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정이정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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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 1862)은 1862년(철종 13) 진주에서 시작된 농민 봉기가 삼남 지방으로 번지자, 조선 정부가 전정·군정·환곡의 문란을 바로잡을 대책을 세우려고 임시로 둔 관청이다.
1862년 봄 임술 농민 봉기가 경상·전라·충청도로 퍼지자, 정부는 안핵사·선무사·암행어사를 보내 수습에 나섰고, 진주 안핵사 박규수는 삼정의 폐단을 고쳐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철종은 5월 이정청을 설치하라고 명했다. 그 날짜를 『철종실록』을 인용한 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는 5월 25일 전교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5월 26일 결정으로 적는다. 정원용·김흥근·김좌근·조두순 등 원로 대신이 총재관을, 김병기·김병국 등이 당상관을 맡았다. 정부는 전국의 관료와 선비에게 삼정 개혁 방안을 묻는 책문을 내리고, 올라온 응지 삼정소를 참고했다.[1][2]
삼정이정청은 그해 윤8월 19일 「삼정이정절목」을 반포하고 문을 닫았다. 안은 주로 총재관 조두순의 생각을 따랐다.
- 전정 - 제도는 그대로 두고 정해진 것 이외의 징수, 도결·방결 같은 폐단만 금지했다.
- 군정 - 어린아이·노인에게 군포를 매기는 일을 막고 군현의 군액을 조정하는 등 기존 틀 안에서 고쳤다.
- 환곡 - 가장 크게 바꾸려 한 부분으로, 환곡을 없애고 그 대신 토지에 세금을 매기는 파환귀결(罷還歸結)을 내세웠다.[3]
절목이 반포되자 민란은 잠시 가라앉았으나, 집권층의 미온적 태도와 각 관청의 반발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그해 10월 옛 제도로 되돌아갔다. 삼정 문란을 불러온 세도 정권의 대신들이 개혁을 맡았다는 한계도 지적된다. 이후 삼정 업무는 비변사가 맡았고, 삼정 개혁은 흥선 대원군 때 호포제·사창제로 일부 이어졌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