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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수(朴珪壽, 1807~1877)는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로, 박지원의 손자이며 조부의 북학 사상을 이어 통상 개화론을 펴고 김옥균·박영효·유길준 등 젊은 양반 자제에게 개화사상을 가르쳐 개화파의 스승이 되었다.

박규수

호는 환재이다. 할아버지 박지원의 『연암집』을 읽으며 실학에 눈을 떴고, 효명 세자와 교유하다 세자가 일찍 죽자 오랫동안 칩거하며 학문에 힘썼다. 1848년(헌종 14)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1]

  • 두 차례의 청 사행 - 1861년 영국·프랑스군이 베이징을 점령해 청 황제가 러허로 피난하자 문안 사절의 부사로 다녀오며 국제 정세를 목격했다. 1872년에는 진하사의 정사로 역관 오경석과 함께 다시 가서 청의 양무운동을 보고 개국·개화를 확신하게 되었다.
  • 진주 농민 봉기의 안핵사 - 1862년(철종 13) 진주에서 농민이 봉기하자 안핵사로 내려가 진상을 조사하고, 원인이 삼정의 문란에 있다고 보고했다(→ 임술 농민 봉기, 삼정이정청).
  • 제너럴 셔먼호 사건 - 1866년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자, 음력 7월 23일(양력 9월 1일) 화공으로 불태워 가라앉혔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같은 해 천주교 박해 때 그의 관할 지역에서는 처형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1][2]
  • 개국 주장 - 1873년 우의정에 올라 흥선 대원군에게 문호를 열어야 한다고 거듭 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물러났다. 1875년 운요호 사건 뒤 일본이 수교를 요구하자 오경석 등과 함께 정부 대신들을 설득해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게 했다.[1]

개화파의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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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관 오경석, 의원 유홍기와 함께 개화사상의 세 선구자로 꼽힌다. 중인인 두 사람과 달리 양반 고관이었던 박규수는 북촌 재동의 자기 집 사랑방으로 젊은 양반 자제들을 불러 『연암집』을 강의하고, 청에서 들여온 『해국도지』 같은 책을 건네며 바깥 세계를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곳에서 김옥균·홍영식·박영효·서광범·김윤식·유길준 등이 배웠고, 이웃에 살던 김홍집도 드나들었다고 본다.[2] 사랑방 교육이 시작된 때를 『신편 한국사』는 평안도 관찰사에서 돌아온 뒤인 1870년 전후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우의정에서 물러난 1874년 이후로 적는다.[2][1]

개항 전후 인물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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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인물
북학 사상을 바탕으로 통상 개화론 주장, 개화파 양성 박규수
영남 만인소를 이끌어 『조선책략』 유포와 개항에 반대 이만손 (→ 영남 만인소)
2차 수신사로 『조선책략』을 들여옴, 갑오·을미개혁 총리대신 김홍집
보빙사 수행, 『서유견문』 저술 유길준
백정 출신으로 관민 공동회에서 연설 박성춘
  1. ↑ 1.0 1.1 1.2 1.3 박규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2. ↑ 2.0 2.1 2.2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신편 한국사』 38 개화와 수구의 갈등,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