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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哲宗, 1831~1863, 재위 1849~1863)은 조선의 제25대 왕으로,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다가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원 왕후의 명으로 즉위했으며, 안동 김씨 세도 정치 아래 1862년 임술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삼정이정청을 두어 수습하려 했다.

군복 차림의 철종 어진(1861)

1844년(헌종 10) 형 회평군의 옥사에 걸려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어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래서 '강화 도령'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1849년 헌종이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자 대왕대비 순원 왕후(순조의 비)의 명으로 서울에 올라와 6월 8일 덕완군에 봉해지고 이튿날 창덕궁 인정문에서 19세에 즉위했다.[1]

  • 수렴청정 - 갑자기 왕이 되었으므로 처음에는 순원 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1851년 순원 왕후의 친척 김문근의 딸을 왕비(철인 왕후)로 맞아, 순조 때부터 이어진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다시 계속되었다.[1]
  • 친정 - 1852년부터 직접 정사를 보았다. 관서 지방의 기근에 선혜청 돈을 풀고, 여주·함흥의 화재민과 영남의 수재민에게 구호금을 내리는 등 빈민 구제에 힘썼으나 실권은 안동 김씨 일족이 쥐고 있었다.[1]

임술 농민 봉기와 삼정이정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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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군정·환곡의 삼정이 문란해지고 탐관오리가 들끓자 1862년(철종 13) 봄 경상도 단성·진주에서 시작된 농민 봉기가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70여 고을로 번졌다(→ 임술 농민 봉기). 철종은 박규수 등의 건의를 받아 5월 25일 임시 기구인 삼정이정청을 설치하라고 명하고, 조정과 재야에 대책을 물어 『삼정이정절목』을 마련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업무가 비변사로 넘어가면서 새 정책은 폐지되고 옛 제도로 돌아갔다.[2]

1860년 경주의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해 퍼져 나가자 조정은 이를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이는' 가르침으로 보아 탄압했다. 최제우는 1863년 12월 붙잡혀 이듬해 3월 대구 감영에서 처형되었다.[3]

1863년 12월 8일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궁인 범씨에게서 난 영혜 옹주가 박영효에게 시집갔을 뿐 아들이 없어, 흥선군의 둘째 아들이 뒤를 이었다(→ 고종). 무덤은 고양의 예릉이다.[1]

1861년(철종 12)에 그린 군복 차림의 철종 어진(보물)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전한다. 임금이 군복을 입은 모습을 그린 어진으로는 유일하며, 화면 오른쪽 3분의 1가량이 없어졌다.[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철종이 최제우를 처형했다고 적지만, 최제우가 처형된 것은 철종이 세상을 떠난 뒤인 1864년(고종 1) 3월이다.[1][3]

19세기 왕의 재위 때 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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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왕
장용영 창설, 신해박해(윤지충 처형) 정조
신유박해, 홍경래의 난 순조
삼정이정청 설치, 임술 농민 봉기, 최제우 체포 철종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 고종(흥선 대원군 집권기)
경신환국 등 여러 차례 환국 숙종
  1. ↑ 1.0 1.1 1.2 1.3 1.4 철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2. ↑ 『철종실록』 권14, 13년 8월 27일, 삼정이정절목 간행, 사료로 본 한국사,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
  3. ↑ 3.0 3.1 동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4. ↑ 보물 철종어진,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