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 철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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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철폐(書院撤廢)는 흥선 대원군 집권기에 붕당의 근거지가 되고 면세·면역의 특권으로 백성을 괴롭히던 서원을 정리해, 1871년(고종 8) 사액 서원 47곳만 남기고 모두 없앤 정책이다.
서원은 16세기 중반 백운동 서원이 소수 서원으로 사액을 받은 뒤 전국으로 퍼졌다. 숙종 이후 수가 크게 늘면서 제향 자격이 없는 인물을 모시거나, 면세·면역 특권을 이용해 향촌 백성에게 돈을 거두는 폐단이 커졌다. 영조도 1741년(영조 17) 1714년 이후 세운 서원·사우를 헐었지만 근본적인 정리는 이루지 못했다. 이때 헐린 수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73곳으로, 『신편 한국사』는 300여 곳으로 적는다.
- 1864년(고종 1) - 수렴청정하던 대왕대비 조씨가 전국 서원의 실태를 조사하게 하고, 서원을 겹쳐 세우거나 사사로이 세우는 일을 금했다.
- 1865년(고종 2) - 노론의 정신적 중심이던 만동묘를 없앴다. 우리역사넷은 만동묘와 화양동 서원의 철폐를 명했다고 하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만동묘의 제사를 멈추고 편액을 떼게 했다고 적는다.
- 1868·1870년 - 사액을 받지 않은 서원과, 사액 서원이라도 후손이 제사를 주도하며 민폐를 끼치는 곳을 헐게 했다. 1868년에는 서원 토지의 면세를 없애고 사액 서원을 수령이 직접 관리하게 했다.[1]
- 1871년(고종 8) - 한 인물에 한 서원만 남긴다는 원칙에 따라, 사액 서원 가운데 47곳(서원 27곳, 사 20곳)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헐었다.[2]
유생 수만 명이 궐문 앞에 모여 만동묘와 서원을 되살려 달라고 호소했으나, 대원군은 이들을 한강 밖으로 몰아내고 서원 땅을 관에 속하게 했다. 정교의 『대한계년사』는 이때 헐린 서원이 1,000여 곳이라고 전한다.[3] 서원 철폐로 지방 양반의 사적 권력이 약해지고 국가 재정과 중앙의 통치력이 강화되었지만, 유림을 반대 세력으로 돌려 대원군이 물러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대원군이 물러난 뒤 1874년 만동묘만 다시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