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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斥和碑)는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흥선 대원군이 서양과의 화친을 거부한다는 뜻을 새겨 서울 종로와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이다.

1871년 미국 아시아 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와 광성보 전투가 벌어진 직후, 고종은 우의정 홍순목에게 교전 보고를 받고 화친을 말하는 자는 나라를 판 죄로 다스리겠다고 하교했고, 이어 서울 종로 네거리와 각 도회지에 척화비를 세우게 했다.[1] 『고종실록』은 이 일을 고종 8년 4월 25일(음력) 기사에 싣고 비문을 함께 적었다.[2] 비문의 문구는 1866년 병인양요 때 대원군이 대신들에게 보낸 결의에서 나왔기 때문에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고 새겼다. 같은 문구를 먹 표면에 새긴 척화묵도 만들어 널리 퍼뜨렸다. 『신편 한국사』는 미국 함대가 물러간 직후(양력 7월 초) 비를 세웠다고 적는다.[3][4]

  • 큰 글씨 -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라는 뜻이다.
  • 작은 글씨 -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자손 만대에 경계하며, 병인년(1866)에 짓고 신미년(1871)에 세운다는 뜻이다. 정교의 『대한계년사』는 첫 구절을 戒我子孫萬年으로 옮겨 적었다.

철거와 남은 비

편집 원본 편집

1882년 조선이 미국과 수호 통상 조약을 맺고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청에 끌려간 뒤, 고종은 그해 8월 5일(음력) 서양과 수호를 맺은 이상 척양의 비석을 모두 뽑으라는 전교를 내렸다. 우리역사넷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척화비」 항목은 이 전교로 철거되었다고 설명하지만, 같은 사전의 「청주 척화비」 항목은 일본 공사의 요구로 모두 철거되었다고 적는다.[5] 서울 종로의 비는 보신각 부근에 묻혔다가 1915년 보신각을 옮길 때 나와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땅에 묻히거나 다른 용도로 쓰이던 비석 일부가 뒤에 발견되어 지금은 부산 용두산 공원, 경상남도 함양, 충청북도 청주 등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청주 척화비는 1976년 길가 하수구 뚜껑으로 쓰이던 것을 찾아 옮긴 것이다.

  1. ↑ 척화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2. ↑ 『고종실록』 8권, 고종 8년 4월 25일 「경성과 각 도회지에 척화비를 세우다」,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8 확인.
  3. ↑ 4) 신미양요와 대응책, 『신편 한국사』 37권,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8 확인.
  4. ↑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척화비, 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8 확인.
  5. ↑ 청주 척화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