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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水原 華城)은 조선 정조가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긴 뒤 1794년(정조 18)부터 1796년(정조 20)까지 팔달산 아래 새 고을 둘레에 쌓은 성곽이다.

수원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

정조는 1789년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 세자의 무덤을 수원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했다. 이때 화산 아래에 있던 수원 고을을 팔달산 아래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새 고을을 둘러싸는 성을 쌓았다. 화성에는 효심과 함께, 당파 정치를 넘어 왕도 정치를 펴려는 정치 구상과 수도 남쪽을 지키는 군사 요새라는 뜻이 담겼다. 국왕 친위 부대인 장용영의 외영도 이곳에 두었다.[1]

  • 공사 - 영중추부사 채제공이 총괄하고 조심태가 공사를 지휘해 1794년 1월 시작해 1796년 9월 마쳤다. 10월에 낙성 잔치를 열었다.[1][2]
  • 정약용과 거중기 - 정약용은 1792년 성의 설계 방안(「성설」)을 올리고, 「기중도설」을 지어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는 거중기를 고안했다. 공사에는 거중기와 녹로 같은 새 기구가 쓰였다.[2]
  • 품삯을 준 공사 - 장인과 일꾼 11,820명에게 품삯을 주고 일을 시켰다. 백성을 무상으로 부리던 부역 대신 임금을 주는 방식으로 바뀌어 가는 모습으로 본다. 비용은 돈 87만여 냥과 곡식 1,500석이 들었다.[2]
  • 『화성성역의궤』 - 공사 계획과 제도, 인력, 재료, 예산, 공사 일지를 자세히 적은 기록으로 1801년(순조 1) 간행되었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때 무너진 부분을 1975~1979년 이 의궤를 근거로 옛 모습대로 복원할 수 있었다.[1]

둘레 약 5.7km로, 동쪽은 평지에, 서쪽은 팔달산에 걸친 평산성이다. 북문인 장안문, 남문인 팔달문, 서문인 화서문, 동문인 창룡문의 4대문과 암문·수문·공심돈·봉돈·포루·장대 등 방어 시설을 두루 갖추었다. 성 안에는 왕이 머무는 화성 행궁을 두었다. 바깥쪽만 돌로 쌓고 안쪽은 흙을 돋워 메우는 방식을 썼다.[1][2]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등재 기준 ⅱ·ⅲ). 사적으로도 지정되어 있으며 팔달문과 화서문은 보물이다.[1]

국가유산청은 공사를 1794년 1월에 시작했다고 적고, 우리역사넷 연대기는 개요에서 2월, 본문에서 1월로 적는다.[1][2]

조선 후기의 성곽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성곽 쌓은 때 특징
남한산성 1624~1626년, 인조 병자호란 때 인조가 피란해 항전
북한산성 1711년, 숙종 도성 북쪽의 산성
수원 화성 1794~1796년, 정조 거중기 사용, 『화성성역의궤』, 장용영 외영
  1. ↑ 1.0 1.1 1.2 1.3 1.4 1.5 수원 화성, 세계유산,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6-10-21 확인.
  2. ↑ 2.0 2.1 2.2 2.3 2.4 화성,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