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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정조 때 관료로 일하며 수원 화성 축조에 거중기를 고안하고, 강진 유배 중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 등을 지어 실학을 집대성한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거중기 그림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이다. 경기도 광주 마현(지금의 남양주 조안면)에서 진주 목사 정재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남인 집안 출신으로 젊어서 이가환·이승훈을 통해 성호 이익의 글을 접하고 그 학문을 이었다. 1789년 문과에 급제한 뒤 정조의 신임을 받아 규장각 초계문신, 홍문관 수찬, 경기 암행어사, 곡산 부사, 형조 참의 등을 지냈다.[1]

정조 때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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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다리 - 1789년 정조가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참배하러 갈 때 한강을 건널 배다리(주교)를 설계했다.
  • 수원 화성 설계와 거중기 - 1793년 정조의 명으로 수원 화성을 설계했다. 예수회 선교사 테렌츠가 서양 기계를 소개한 『기기도설』 등을 참고해 도르래의 원리로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는 거중기를 고안했고, 이 기구는 화성 공사에 쓰였다. 『화성성역의궤』에 그 그림과 쓰임이 실려 있다.[2]
  • 천주교와의 관계 - 이벽·이승훈과 어울리며 서학에 관심을 가졌다. 1791년 진산 사건 이후 천주교와 관련된 혐의로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았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이듬해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고, 곧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져 다시 조사를 받은 뒤 전라도 강진으로 옮겨졌다. 형 정약전은 이때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자산어보). 강진 유배는 1818년까지 18년 동안 이어졌고, 그 가운데 10여 년은 만덕산 기슭의 다산초당에서 지내며 제자를 가르치고 책을 썼다.[3] 그의 저술은 경학과 문집을 합쳐 500여 권에 이른다.[1]

  • 『경세유표』 - 중앙 관제와 토지·조세 제도의 개혁안을 담았다.
  • 『목민심서』 - 지방관(목민관)이 지켜야 할 도리와 실무를 정리했다.
  • 『흠흠신서』 - 형벌과 재판을 신중히 하도록 형옥의 사례와 원칙을 다루었다.
  • 토지 개혁론 - 「전론」에서 마을(여) 단위로 토지를 함께 경작하고 일한 만큼 나누는 여전제를 주장했고, 뒤에 『경세유표』에서는 정전제를 현실에 맞게 고친 방안을 내놓았다. 농사짓는 사람이 땅을 가져야 한다는 경자유전의 원칙을 분명히 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고향 마현으로 돌아가 「자찬묘지명」을 짓고 저술을 다듬다가 1836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글은 1934~1938년 『여유당전서』로 간행되었다.[1]

조선 후기 학자들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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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저술 인물
거중기 설계, 『목민심서』·『경세유표』, 여전론 정약용
『북학의』, 규장각 검서관, 『무예도보통지』 편찬 참여 박제가
양명학을 체계화해 강화학파를 이룸 정제두
추사체 창안, 「세한도」 김정희
흑산도 유배 중 『자산어보』 저술 정약전 (→ 자산어보)
『의산문답』에서 지전설 주장 홍대용
  1. ↑ 1.0 1.1 1.2 정약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거중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3. ↑ 사적 강진 정약용 유적,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