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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南漢山城)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에 있는 산성으로, 신라의 주장성 터에 조선 인조가 1624~1626년 고쳐 쌓아 유사시 임시 수도로 삼았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들어가 청군에 맞서 싸운 곳이다.

남한산성 서쪽 장대인 수어장대

서울에서 남동쪽으로 약 25km 떨어진 산지에 있다. 바깥쪽은 가파르고 안쪽은 완만해 지키기에 유리하다. 『삼국사기』는 673년(문무왕 13) 한산주에 둘레 4,360보의 주장성을 쌓았다고 전하는데, 발굴 조사로 조선 성벽 안쪽에서 이 신라 성벽으로 보이는 흔적이 확인되었다. 고려 때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광주성'에서 버텼다는 기록도 이곳으로 본다.[1]

  • 인조의 개축 - 후금의 위협이 커지고 이괄의 난(1624)으로 도성을 버리고 피란한 일을 겪은 뒤, 인조는 1624년 총융사 이서에게 산성을 쌓게 했다. 승려 각성을 도총섭으로 삼아 전국 8도의 승군을 동원했고, 승군이 머물 장경사 등 사찰 7곳을 새로 지었다. 2년 뒤 완성되자 광주의 관아를 산성 안으로 옮겼다.[1]
  • 수어청 - 산성과 광주 일대를 지키는 군영으로 수어청을 두었다(→ 5군영).
  • 시설 - 동문(좌익문)·서문(우익문)·남문(지화문)·북문(전승문)의 4대문과 16곳의 암문, 장대·옹성·포루를 갖추었다. 성 안에는 왕이 머물 행궁과 종묘·사직을 옮겨 모실 좌전·우실까지 마련했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이 보강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가장 잘 갖추어진 산성으로 꼽힌다.[1]

병자호란과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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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12월 청 태종이 직접 쳐들어오자 인조는 강화도로 가려 했으나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성 안에서 47일 동안 버텼으나 근왕병이 포위를 풀지 못했고(광교산 전투 등), 강화도가 함락되고 식량이 떨어지자 1637년 1월 30일(음력) 서문으로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 병자호란).[2] 1688년(숙종 14)에는 끝까지 화의를 반대한 삼학사(홍익한·윤집·오달제)와 김상헌·정온을 모신 사당 현절사를 성 안에 세웠다.[1]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7세기 동아시아 방어 축성술을 종합해 보여 주고, 사람이 살며 임시 수도의 기능을 갖춘 산성 도시의 뛰어난 사례라는 점이 인정되었다(등재 기준 ⅱ·ⅳ). 성 안에는 지금도 주민이 산다.[3]

서울·경기의 성곽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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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 있었던 일
강화산성 강화도의 성.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도로 피란했다. 정봉수가 후금군과 싸운 곳은 평안도 철산의 용골산성이다(→ 정묘호란).
북한산성 숙종 때 도성 북쪽에 쌓은 산성. 김준룡이 청군과 싸운 곳은 용인의 광교산이다(→ 광교산 전투).
서울 한양도성 조선의 도성. 신립이 배수진을 친 곳은 충주 탄금대이다(→ 탄금대 전투).
남한산성 병자호란 때 인조가 피란해 항전한 곳
수원 화성 정조가 쌓은 성. 권율이 일본군을 크게 물리친 곳은 고양의 행주산성이다(→ 행주 대첩).
  1. ↑ 1.0 1.1 1.2 1.3 남한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2.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다. 서울 창경궁으로 나아가다,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
  3. ↑ 남한산성, 세계유산,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