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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忠烈王, 1236~1308, 재위 1274~1298, 1298~1308)은 고려의 제25대 왕으로, 원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한 첫 부마 국왕이며, 원 간섭기 초기에 일본 원정에 동원되고 관제를 격하하는 한편 통문관과 응방을 두었다.

이름은 왕거(王昛)이고 원종의 맏아들이다. 세자 시절인 1269년 무신 집권자 임연이 원종을 폐위하자 원의 힘을 빌려 아버지를 복위시켰고, 그 과정에서 원 황실과의 혼인을 청해 1274년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쿠틀룩 켈미시)와 혼인했다. 같은 해 원종이 죽자 즉위했다. 이때부터 고려 왕은 원 황실의 사위(부마)가 되었고, 왕의 묘호에 '충(忠)' 자가 붙기 시작했다.[1]

몽골풍과 공주의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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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한 해 공주가 고려로 들어오자 충렬왕은 서북면까지 나가 맞이했다. 이때 왕은 원에 입조할 때 이미 몽골식으로 머리를 깎았는데, 수행한 신하들이 아직 변발을 하지 않은 것을 꾸짖었다. 『고려사』는 몽골 풍속이 정수리에서 이마까지 머리를 네모나게 깎고 가운데만 남기는 것이며 이를 '겁구아'라 한다고 설명한다.[2] 이후 신료들도 변발과 호복을 따랐고, 공주를 따라온 사속인인 겁령구를 통해 몽골의 풍속과 말이 왕실에 퍼졌다. → 몽골풍

원 간섭과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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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원정(1274·1281) - 김방경이 이끈 고려군이 원군과 함께 합포에서 출정했으나 두 번 모두 태풍으로 실패했다. 1280년 원정을 위해 정동행성을 두었고 충렬왕이 그 승상을 겸했다.
  • 관제 격하(1275) -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 추밀원을 밀직사, 6부를 4사로 고쳤다. 짐은 고(孤), 폐하는 전하, 태자는 세자로 낮추었다.
  • 도평의사사(1279) - 도병마사를 도평의사사(도당)로 고쳤고, 이후 고려 후기 최고 정무 기구가 되었다.[3]
  • 영토 반환 - 1290년 동녕부가 있던 서경 일대를, 1294년 탐라를 돌려받았다. → 동녕부
  • 새 기구 - 몽골식 야간 순찰대인 순마소, 왕의 숙위인 홀치, 원에 바칠 매를 기르는 응방을 두었다.

통문관과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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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문관(1276) - 역관들이 미천한 출신으로 말을 사실대로 옮기지 않고 사익을 챙기자, 김구의 건의로 젊은 관리들에게 한어(중국어)를 익히게 한 기관이다. 뒤에 사역원으로 이어졌다.[4]
  • 안향이 원에서 성리학을 들여왔고, 섬학전을 거두어 양현고를 보충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1287), 일연의 삼국유사가 이 시기에 나왔다.

1298년 세자(충선왕)에게 왕위를 넘겼으나 충선왕이 같은 해 폐위되자 다시 즉위했다. 이후 충렬왕 지지 세력과 충선왕 지지 세력이 원 조정에서 다투었고, 1307년 충선왕이 원 무종 옹립에 공을 세우면서 실권을 잃은 채 1308년 죽었다.[1]

원 간섭기 왕들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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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왕
제국대장공주와 혼인, 통문관·응방 설치, 일본 원정, 도평의사사 개칭 충렬왕
원 수도에 만권당, 각염법(소금 전매), 사림원, 심양왕 충선왕
쌍성총관부 탈환, 정동행성 이문소 폐지, 전민변정도감 공민왕
국청사에서 천태종 개창 숙종 대의 의천
  1. ↑ 1.0 1.1 충렬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고려사』 권28 세가28 충렬왕 즉위년, 왕이 변발을 하지 않은 신료들을 책망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3. ↑ 『고려사』 권77 지31 백관2, 도평의사사의 연혁,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4. ↑ 『고려사』 권76 지30 백관1, 통문관의 설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