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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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李麟佐의 亂, 1728)은 1728년(영조 4) 3월 정권에서 밀려난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영조와 노론을 몰아내려고 일으킨 반란으로, 일어난 해의 간지를 따서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한다.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죽고 세제였던 영조가 즉위하자, 경종 때 신임사화로 노론을 몰아냈던 소론은 책임을 추궁당해 처지가 위태로워졌다. 박필현·이유익·심유현 등 소론 강경파는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밀려난 남인을 끌어들여, 경종이 독살되었다는 의혹과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소현 세자의 증손 밀풍군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온건 소론이 다시 기용되자 동조자를 늘리기 어려워졌고, 거사 직전 최규서 등의 고변으로 계획이 드러났다.[1]
- 청주성 함락 - 3월 15일 이인좌는 상여에 무기를 싣고 들어가 청주성을 점령하고 병마절도사 이봉상을 죽였다. 스스로 대원수라 칭하고 경종의 원수를 갚는다는 깃발을 세웠다.
- 영남·호남의 호응 - 정희량이 이인좌의 동생 이웅보와 함께 안음·거창·합천·함양 등을 장악했고, 호남에서도 박필현 등이 호응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 진압 - 영조는 병조 판서 오명항을 사로 도순무사로, 박문수를 종사관으로 삼아 토벌군을 보냈다. 『영조실록』 4년 3월 23일 기사는 오명항이 안성에서 반군을 크게 격파한 일을 전하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3월 24일 안성·죽산의 반군을 소탕했다고 적는다. 이인좌는 죽산으로 달아났다가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되었고, 영남의 반군도 지방 관군에 진압되었다.[2]
난을 진압하는 데 소론 정권이 앞장섰지만 주모자 대부분이 소론이어서 소론의 입지는 크게 약해졌다. 영조는 이 난을 겪으며 붕당 정치의 폐해를 절감해 탕평책을 본격적으로 밀고 나갔고,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는 명분으로 삼았다.[1] 이듬해인 1729년에는 송인명 등에게 난의 경과와 죄인들의 진술, 공신 명단을 모은 『감란록』을 펴내게 했다. 영조의 어제 서문은 난의 원인을 붕당에서 찾고, 같은 변란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이 책을 편찬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