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제의 난
더 많은 작업
이필제의 난(李弼濟의 亂, 1871)은 1871년(고종 8) 3월 10일(음력) 이필제가 동학교도를 끌어들여 경상도 영해부를 습격하고 부사를 죽인 봉기로, '영해 동학란' 또는 '영해 민란'이라고도 한다.
이필제는 1869년부터 1871년까지 진천·진주·영해·문경 네 곳에서 잇따라 변란을 꾀한 인물이다. 『정감록』의 예언과 서양 세력이 쳐들어온다는 위기감을 내세워 사람을 모았으나, 진천과 진주(남해) 거사는 미리 드러나거나 흩어져 실패했다. 네 차례 가운데 실제로 거사에 성공한 것은 영해뿐이었다.[1]
진주에서 실패한 이필제는 1870년 영해로 숨어들어 스스로 동학교도라 하며 그 지역 교도들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에게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1864년 처형된 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자고 설득했다. 처음에 거절하던 최시형은 1871년 2월 이필제를 직접 만난 뒤 거사에 함께하게 되었다. 거사일은 최제우가 처형된 날인 3월 10일로 정했다.[1]
3월 10일 해 질 무렵 산에서 제사를 지낸 무리는 조총·죽창·칼로 무장하고 밤에 영해부 관아에 쳐들어가 군기고의 무기를 빼앗고 부사 이정을 죽였다. 격문에는 부사의 탐학을 성토할 뿐 백성을 해칠 뜻은 없다고 썼다. 동원된 수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500여 명, 『신편 한국사』는 5~6백 명으로 적는다. 관아를 점령한 때를 3월 11일로 적는 자료도 있다. 봉기는 며칠 만에 진압되었고, 이필제는 그해 8월 문경에서 다시 변란을 꾀하다 붙잡혔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