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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 1894)은 1894년 전봉준 등 동학 지도자와 농민들이 탐관오리의 수탈과 외세의 침략에 맞서 전라도에서 일으켜 삼남 일대로 번진 반봉건·반외세 농민 항쟁이다.

1895년 법무아문으로 압송되는 전봉준

동학 농민 혁명, 갑오 농민 전쟁이라고도 한다. 개항 뒤 일본으로 쌀이 빠져나가고 지방관의 가렴주구가 심해지면서 농민의 불만이 커졌다. 동학은 1892~1893년 삼례 집회와 보은 집회 등 교조 신원 운동을 벌이며 조직을 넓혔고, 보은 집회에서는 '척왜양창의'(일본과 서양을 물리치자)를 내걸었다. 1894년 고부 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맞선 민란이 계기가 되어 두 차례의 대규모 봉기로 이어졌다(아래 월은 음력).[1]

1차 봉기 (반봉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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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부 민란(1월) - 조병갑이 필요 없는 만석보를 새로 쌓게 하고 물세를 거두자, 전봉준을 앞세운 농민들이 고부 관아를 점령했다. 정부는 조병갑을 파면했으나, 안핵사 이용태가 봉기 참여자를 동학교도로 몰아 탄압했다.
  • 무장 기포와 백산 봉기(3월) - 전봉준·손화중·김개남이 무장에서 다시 일어나 고부 백산에 모였다. 보국안민(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히)과 제폭구민(폭정을 없애고 백성을 구함)을 내건 격문과 4대 강령을 발표했다.
  • 황토현·황룡촌 전투(4월) - 황토현에서 전라 감영군을, 장성 황룡촌에서 홍계훈이 이끈 정부군을 물리쳤다.
  • 전주성 점령(4월 말) - 농민군이 전주성에 들어갔다. 정부가 청에 군대를 청하자, 일본도 톈진 조약을 내세워 군대를 보냈다.

전주 화약과 집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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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주 화약(5월) - 외국 군대가 들어오자 농민군은 폐정 개혁을 조건으로 정부와 화약을 맺고 전주성에서 물러났다.
  • 집강소 - 전라도 각 고을에 농민 자치 기구인 집강소를 두고, 전주에 대도소를 두어 폐정 개혁을 추진했다. 정부도 교정청을 설치해 스스로 개혁하려 했다.
  • 폐정 개혁안 - 탐관오리·횡포한 부호의 처벌, 노비 문서 소각, 칠반천인의 대우 개선과 백정의 평량갓 폐지, 청상과부의 재가 허용, 무명잡세 폐지, 왜와 내통하는 자의 처벌, 토지의 평균 분작 등을 담았다. 일부는 갑오개혁에 반영되었다.

2차 봉기 (반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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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경 -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 전쟁을 일으켰으며, 군국기무처가 세워져 갑오개혁이 시작되었다.
  • 재봉기(9월) - 전봉준이 삼례에서 다시 일어났고, 손병희가 이끈 북접도 합세해 남접과 북접이 논산에 모였다.
  • 우금치 전투(11월) -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신식 무기에 크게 패했다. 전봉준은 순창에서 붙잡혀 1895년 처형되었다.

아래로부터 신분제 폐지 등 봉건 질서의 개혁을 요구한 반봉건 운동이자, 일본의 침략에 맞선 반외세 운동이었다. 농민군의 잔여 세력 일부는 뒤에 의병 투쟁에 참여했다. 동학 교단은 1905년 손병희가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어 이어 갔다. 봉기 전의 사발통문, 『전봉준 공초』, 정부와 진압군의 보고서 등 1894~1895년의 관련 기록은 2023년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다.

다른 운동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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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운동
보국안민·제폭구민을 내걸음, 전주 화약 뒤 집강소 설치, 우금치 전투 동학 농민 운동(1894)
서북 지역 차별에 반발, 정주성 항전 홍경래의 난(1811)
백낙신의 수탈에 반발한 진주 농민 봉기, 삼정이정청 설치 임술 농민 봉기(1862)
군국기무처 설치, 과거제·신분제 폐지 갑오개혁(1894)
김광제·서상돈의 발의로 시작된 모금 운동 국채 보상 운동(1907)
일제가 제암리 학살을 저지름 3.1 운동(1919)
  1. ↑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