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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崔時亨, 1827~1898)은 동학의 제2대 교주로, 최제우가 처형된 뒤 30여 년 동안 숨어 다니며 경전을 펴내고 포접 조직을 갖추어 교단을 다시 일으켰으며 1898년 붙잡혀 처형되었다.

1898년 체포된 뒤의 최시형

호는 해월(海月)이며 경상도 경주 출신이다. 마을 대표인 집강을 6년 동안 맡기도 했다. 1861년 6월 동학에 들어가 최제우에게 배웠고, 1863년 경상도 각지에 포교해 많은 신도를 얻은 뒤 그해 8월 도통(교주 자리)을 이어받았다. 그해 12월 최제우가 붙잡히자 태백산으로 피신했다.[1]

  • 피신과 포교 - 영양 용화동에 자리 잡아 기도회와 계를 꾸려 신도를 모았다. 1871년 이필제가 영해에서 봉기하면서 다시 탄압을 받자 소백산 일대와 강원도 영월·인제, 충청도 단양 등지로 옮겨 다녔다.
  • 경전 간행 - 1880년 인제에서 『동경대전』, 1881년 단양에서 『용담유사』를 펴냈다.
  • 조직 정비 - 1878년 개접제, 1884년 육임제를 마련했다. 각지의 접을 지역별 포로 묶고 대접주가 접주를 거느리게 한 포접제로 교세가 삼남과 강원도까지 크게 늘었다. 1885년 본거지를 충청도 보은 장내리로 옮겼다.
  • 교조 신원 운동 - 1892년 삼례 집회, 1893년 2월 광화문 복합 상소, 1893년 3월 보은 집회를 이끌었다. 보은 집회 뒤 정부가 탐관오리를 파면하자 해산했다.[1]
  • 동학 농민 운동 - 처음에는 무력 봉기를 시기상조로 보았으나, 1894년 9월 전봉준의 2차 봉기 때 북접 교도를 모아 호응했다.
  • 사인여천(事人如天) -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하라고 가르쳤다.
  • 삼경(三敬) - 한울·사람·만물을 모두 공경하라고 했다.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도 한울이 한울을 먹는 것(이천식천)이라 했다.
  • 향아설위 - 제사상을 벽 쪽이 아니라 자기 쪽으로 차리게 했다.

1897년 손병희에게 도통을 넘겼다. 1898년 음력 4월 5일 강원도 원주 송골에서 관군에게 붙잡혀 서울로 끌려갔다. 고등 재판소에서 교형을 선고받았고, 음력 6월 2일(양력 7월 20일) 형이 집행되었다. 시신은 제자 이종훈이 수습해 묻었다가 1900년 3월 경기도 여주 천덕봉 아래로 옮겼다.[2]

동학 지도자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인물 역할 관련 사실
최제우 1대 교주 1860년 동학 창시, 1864년 혹세무민 죄로 처형 (→ 동학)
최시형 2대 교주 『동경대전』·『용담유사』 간행, 포접제, 교조 신원 운동, 1898년 처형
손병희 3대 교주 1905년 천도교 선포, 3.1 운동 민족 대표
전봉준 고부 접주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지도
  1. ↑ 1.0 1.1 최시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최시형 묘소,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정보,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