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메뉴 여닫기
환경 설정 메뉴 여닫기
개인 메뉴 여닫기
로그인하지 않음
지금 편집한다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될 수 있습니다.

교조 신원 운동(敎祖伸寃運動)은 1864년 처형된 동학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죄명을 벗기고 동학을 공인받으려고 동학교도들이 벌인 운동으로, 1892~1893년 삼례 집회·서울 복합 상소·보은 집회를 거치며 반외세 정치 운동으로 바뀌어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으로 이어졌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1864년(고종 1)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였다'(혹세무민)는 죄로 처형되었다. 그 뒤 2대 교주 최시형이 교단을 다시 일으켰으나 지방관과 토호의 탄압과 수탈은 계속되었다. 교도들은 교조의 원통함을 풀어 주는 것(신원)과 탄압을 멈추게 하는 것을 요구했는데, 개항 뒤 농민의 반봉건·반외세 요구가 더해지면서 운동은 점점 정치적 성격을 띠었다.[1]

  • 이필제의 난(1871) - 이필제가 최시형과 손잡고 교도 200여 명을 모아 영해에서 봉기해 부사를 죽였다. 백과사전은 이를 첫 번째 신원 운동으로 본다.
  • 공주·삼례 집회(1892) - 1892년 10월 공주에 모여 충청 감사 조병식에게 신원과 탄압 금지를 요구하는 소장을 냈고, 11월에는 전라도 삼례역에 수천 명이 모여 전라 감사 이경직에게 동학 공인과 수탈 중지를 요구했다. 동학이 생긴 뒤 처음 있는 대규모 집회였다.
  • 서울 복합 상소(1893년 2월) - 박광호를 대표로 한 교도 40여 명이 경복궁 광화문 앞에 엎드려 사흘 밤낮 교조 신원을 호소했다. 고종은 돌아가 생업에 힘쓰면 소원대로 해 주겠다고 했으나, 곧 주모자 체포를 명했다.
  • 보은 집회(1893년 3월) - 최시형의 통문에 따라 충청도 보은 장내리에 2만여 명이 모였다. 이 집회는 척왜양창의(일본과 서양을 물리치고 의를 일으킨다)를 내걸어 반외세 정치 운동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같은 때 전라도 금구에서는 서장옥·전봉준·손화중 등 남접 교도가 따로 모였다.[1]
  • 해산 - 조정은 어윤중을 양호 선무사로 보내 타일렀고, 교단 지도부는 이를 받아들여 해산했다. 『고종실록』에는 어윤중이 보은의 무리를 타일러 흩어지게 했다는 보고가 1893년 3월 30일 자로 실려 있고, 백과사전은 해산일을 4월 3일로 적는다.[2]

교조 신원 운동을 거치며 동학의 조직은 전국으로 넓어졌고, 교단 상층부(북접)의 종교적 요구와 남접 지도자들의 반봉건·반외세 요구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1894년 1월 고부 민란을 기점으로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이 이끈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다.[1]

동학과 관련된 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건 때 내용
최제우 처형 1864년 혹세무민의 죄
교조 신원 운동 1892~1893년 삼례 집회, 복합 상소, 보은 집회(척왜양창의)
동학 농민 운동 1894년 고부 민란, 전주 화약, 집강소, 우금치 전투
천도교 개칭 1905년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바꿈 (→ 천도교)
  1. ↑ 1.0 1.1 1.2 교조신원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고종실록』 30권, 고종 30년 3월 30일, 양호 선무사 어윤중이 보은군의 난민을 효유하여 해산시켰다고 치계하다,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