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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몽골 전쟁은 1231년(고종 18)부터 1259년(고종 46)까지 몽골이 여러 차례 고려에 쳐들어오고, 최씨 무신 정권이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맞선 전쟁이다. 대몽 항쟁이라고도 한다.

1218년 거란 유민이 고려로 쫓겨 들어오자 고려와 몽골은 함께 강동성의 거란을 쳤고(강동성 전투), 이를 계기로 형제 맹약을 맺었다. 이후 몽골은 해마다 지나친 공물을 요구했고,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가 돌아가던 길에 압록강 근처에서 죽자 이를 고려의 짓이라 하여 관계를 끊었다. 1231년 몽골은 저고여 피살을 구실로 첫 침입을 시작했다. 전쟁은 30년 가까이 이어지며 국토를 크게 황폐하게 했고, 강화 이후 고려는 원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1]

  • 1차 침입(1231) - 살리타가 이끄는 몽골군이 쳐들어왔다. 귀주성에서 박서가 끝까지 막아 냈으나 개경이 포위되자 고려는 강화를 맺었다. 몽골은 다루가치 72명을 두고 물러갔다.
  • 강화 천도(1232) - 무신 집권자 최우가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고 백성을 산성과 섬으로 들어가게 해(입보) 장기전을 준비했다(→ 최씨 무신 정권).
  • 2차 침입(1232) - 살리타가 다시 쳐들어왔으나 용인 처인성에서 승려 김윤후가 이끈 군민에게 살리타가 화살에 맞아 죽자 물러갔다. 이때 대구 부인사에 있던 초조대장경이 불탔다.[2]
  • 3차 침입(1235~1239) -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이 불탔다. 고려는 부처의 힘으로 적을 물리치려고 대장도감을 두어 팔만대장경(재조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해 1251년 완성했다.
  • 죽주성 전투(1236) - 3차 침입 때 죽주 방호별감 송문주가 죽주산성(지금의 안성 죽산)에서 15일 동안 몽골군의 공격을 막아 내고 물리쳤다. 송문주는 1차 침입 때 귀주성에서 박서와 함께 싸운 경험으로 몽골군의 공성 방법을 미리 알고 대비했다고 한다.
  • 5차 침입(1253~1254) - 충주산성 방호별감 김윤후가 노비 문서를 불태우며 관노·백정을 독려해 70여 일 동안 성을 지켰다.
  • 이후 침입 - 1255년 충주 다인철소 주민이 몽골군을 물리쳐 소가 익안현으로 승격되었다. 잘라이르타이가 이끈 침입(1254~1259) 때 가장 많은 사람이 끌려가고 죽었다.

강화와 그 뒤

편집 원본 편집
  • 최씨 정권 붕괴 - 1258년 최의가 살해되어 최씨 정권이 무너졌고, 같은 해 몽골은 화주(영흥)에 쌍성총관부를 두었다.
  • 강화(1259) - 태자(뒤의 원종)가 몽골에 들어가 쿠빌라이를 만나 화의를 맺었다. 고려는 고유한 풍속을 지키는 것(불개토풍)을 약속받았다.
  • 개경 환도와 삼별초 항쟁(1270~1273) - 1270년 무신 정권이 끝나고 개경으로 돌아가자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가 반발해 승화후 온을 왕으로 세우고 진도 용장성, 이어 김통정이 제주도 항파두리성으로 옮겨 싸우다 1273년 여몽 연합군에 진압되었다. 몽골은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두었다.

다른 시기의 전쟁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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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전쟁
서희의 외교 담판, 강감찬의 귀주 대첩 고려 거란 전쟁
별무반 편성, 동북 9성 여진 정벌(윤관)
박서의 귀주성 방어, 김윤후의 처인성·충주성 전투, 삼별초 항쟁 고려 몽골 전쟁
권율의 행주 대첩,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 임진왜란
정봉수의 용골산성, 인조의 강화도 피난 정묘호란
김준룡의 광교산 항전, 남한산성 농성 병자호란
  1. ↑ 몽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2. ↑ 김윤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