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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두(鄭齊斗, 1649~1736)는 주자학이 이단으로 배척하던 양명학을 연구해 처음으로 사상 체계를 세우고, 강화도에서 제자들과 함께 강화학파를 이룬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정제두의 묘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이다. 정몽주의 후손이고 영의정 정유성의 손자이다. 박세채에게 배웠으나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학문에 전념했다. 숙종 때 천거로 벼슬을 받았고 이후 대사헌·이조 참판·우참찬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나아가지 않았다. 1709년 강화도 하곡으로 옮겨 살았으며, 1736년(영조 12) 세자이사로 있다가 88세로 죽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1]

  • 양명학 - 명나라 왕수인(왕양명)의 학문으로, 마음이 곧 이치라는 심즉리, 타고난 앎을 실현하는 치양지, 앎과 행함이 하나라는 지행합일을 핵심으로 한다(→ 양명학).
  • 주자학 비판 - 당시 학자들이 주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주자를 핑계 삼아 사사로운 이익을 꾀한다고 비판했다.
  • 논쟁 - 스승 박세채가 「왕양명학변」을 지어 양명학을 버리라고 권했고, 민이승·윤증·최석정 등과 편지로 논쟁했다. 1726년 양명학을 한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으나 영조가 감싸 주었다.
  • 저술 - 치양지설과 지행합일설을 받아들여 『학변』과 『존언』을 지었다. 「양지체용도」를 그려 양지의 본체와 작용을 그림으로 나타내기도 했다.

정제두는 소론 집안 출신이었고, 아들 정후일과 윤순·이광사 형제 등 문인이 그 학풍을 이었다. 주자학이 정통이던 시대라 겉으로 드러나지 못한 채 강화도를 중심으로 집안과 사제 관계를 통해 이어졌으므로 강화학파라 부른다.[1]

사료 기록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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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의 졸기는 정제두가 젊어서 왕양명의 학설을 좋아했으나 선배와 벗들의 꾸짖는 편지를 받고 끝내 정자·주자의 학문으로 돌아갔으며, 평생 강설과 저술을 즐기지 않았다고 적었다.[2] 반면 백과사전은 『학변』·『존언』 등을 근거로 그가 양명학을 끝까지 체계화했다고 본다. 양명학을 이단으로 여기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관찬 기록이 그의 학문을 조심스럽게 적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학자들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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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저술 인물
양명학 연구, 『학변』·『존언』, 강화학파 정제두
『기기도설』을 참고해 거중기 고안, 『목민심서』 정약용
『북학의』, 규장각 검서관 박제가
추사체 창안, 「세한도」 김정희
「지부복궐척화의소」, 왜양일체론 최익현
  1. ↑ 1.0 1.1 정제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영조실록』 42권, 영조 12년 8월 11일, 우찬성 세자 이사인 정제두의 졸기,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