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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崔益鉉, 1833~1907)은 흥선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해 그를 물러나게 하고, 강화도 조약 체결에 맞서 도끼를 메고 상소해 왜양일체론을 폈으며, 을사늑약 뒤 의병을 일으켰다가 쓰시마에서 순국한 조선 말기의 위정척사 유학자이다.

채용신이 그린 최익현 초상

호는 면암(勉菴)이다. 14세 때 경기도 양근 벽계에 물러나 있던 위정척사 학자 이항로에게 배워, 임금을 아비처럼 사랑하고 나라를 집처럼 걱정하라는 가르침을 이어받았다. 1855년(철종 6) 문과에 급제해 사헌부 지평·사간원 정언 등 언관과 지방관을 지냈고, 1870년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문집으로 『면암집』이 있다.[1]

대원군 비판 (1868·1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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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8년 상소에서 흥선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 생긴 폐단을 비판했다.
  • 1873년 「계유상소」로 만동묘 철폐 등 대원군의 서원 철폐 정책과 실정을 비판했다.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의 10년 집권이 끝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어 올린 상소가 지나치다는 이유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개항 반대 (1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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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1월(음력) 일본과의 수교 논의가 진행되자 도끼를 들고 궐문 앞에 엎드려 「지부복궐척화의소」(병자 지부복궐소)를 올렸다. 그는 일본과의 화친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다섯 가지 이유를 들고, 지금 온 일본인들이 서양 옷을 입고 서양 대포를 쏘며 서양 배를 타고 다니니 일본과 서양은 한가지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왜양일체론이라 한다. 조정은 그를 흑산도로 유배했다.[2] 그럼에도 조선은 다음 달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 을미년(1895) -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맞서 상소를 올렸다.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상투는 자를 수 없다"며 단발을 거부한 일로 알려져 있다.
  • 을사년(1905) -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조약 무효와 을사오적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 태인 의병(1906) - 1906년 윤4월 13일(음력) 74세의 나이로 임병찬 등과 함께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정읍을 거쳐 순창에 들어갔다. 윤4월 하순 순창에서 관군과 일본 군경에 포위되자 부대를 해산했고, 끝까지 곁에 남은 '12의사'와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3] 일본 쓰시마(대마도)에 감금되었다가 1906년 음력 11월(양력 1907년 1월) 그곳에서 순국했다.[1]

이 의병은 을사의병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항일 의병 운동).

위정척사 운동의 흐름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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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주장 인물
1860년대 통상 반대, 척화 주전론 이항로·기정진
1870년대 개항 반대, 왜양일체론, 지부복궐척화의소 최익현
1880년대 『조선책략』 유포 반대, 영남 만인소 이만손 (→ 조선책략)
1890년대 을미의병 유인석·이소응 (→ 항일 의병 운동)
1900년대 을사의병, 쓰시마 순국 최익현·민종식·신돌석
  1. ↑ 1.0 1.1 최익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고종실록』 13권, 고종 13년 1월 23일, 일본과 통상을 맺는 일에 관하여 최익현이 상소하다,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3. ↑ 양재해, 독립운동인명사전,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독립기념관),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