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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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崔益鉉, 1833~1907)은 흥선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해 그를 물러나게 하고, 강화도 조약 체결에 맞서 도끼를 메고 상소해 왜양일체론을 폈으며, 을사늑약 뒤 의병을 일으켰다가 쓰시마에서 순국한 조선 말기의 위정척사 유학자이다.

호는 면암(勉菴)이다. 14세 때 경기도 양근 벽계에 물러나 있던 위정척사 학자 이항로에게 배워, 임금을 아비처럼 사랑하고 나라를 집처럼 걱정하라는 가르침을 이어받았다. 1855년(철종 6) 문과에 급제해 사헌부 지평·사간원 정언 등 언관과 지방관을 지냈고, 1870년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문집으로 『면암집』이 있다.[1]
- 을미년(1895) -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맞서 상소를 올렸다.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상투는 자를 수 없다"며 단발을 거부한 일로 알려져 있다.
- 을사년(1905) -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조약 무효와 을사오적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 태인 의병(1906) - 1906년 윤4월 13일(음력) 74세의 나이로 임병찬 등과 함께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정읍을 거쳐 순창에 들어갔다. 윤4월 하순 순창에서 관군과 일본 군경에 포위되자 부대를 해산했고, 끝까지 곁에 남은 '12의사'와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3] 일본 쓰시마(대마도)에 감금되었다가 1906년 음력 11월(양력 1907년 1월) 그곳에서 순국했다.[1]
이 의병은 을사의병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항일 의병 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