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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曺晩植, 1883~1950)은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를 이끌며 물산 장려 운동을 일으키고 오산 학교 교장, 신간회 평양 지회장, 조선일보 사장을 지냈으며, 광복 뒤 북한에서 신탁 통치에 반대하다 소련군에 연금된 민족 운동가이다.

조만식

호는 고당이고 평안남도 강서 출신이다. 평양 숭실 중학에 들어가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1908년 일본에 유학해 1913년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유학 중 인도 간디의 비폭력·무저항주의에 깊이 끌려 평생 민족 운동의 길잡이로 삼았다. 귀국 뒤 이승훈이 세운 정주 오산 학교의 교사가 되었다가 1915년 교장이 되었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해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1]

물산 장려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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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옥 뒤 평양 기독교 청년회(YMCA) 총무와 산정현 교회 장로가 되었고, 오윤선 등과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를 조직해 회장을 맡았다.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을 내건 이 운동은 1923년 서울에 조선 물산 장려회가 생기면서 전국으로 번졌다(물산 장려 운동). 평양 조직이 생긴 해는 자료마다 다르다. 공훈전자사료관은 1922년 7월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조만식 항목도 1922년으로 적지만, 같은 사전의 조선물산장려회 항목은 평양 조직을 1920년의 일로 적는다.[1][2]

1920~1940년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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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립 대학 - 1923년 송진우·김성수 등과 민립 대학 설립 운동에 참여했다.
  • 신간회 - 1927년 자치론을 비판하고 절대 독립을 내건 신간회 창립에 함께했고, 평양 지회장을 맡았다.
  • 언론·체육 - 1930년 관서 체육회 회장, 1932년 조선일보 사장을 지냈다.
  • 비협력 - 1943년 지원병 제도에 협조해 달라는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의 요청을 거절해 한때 구금되었다.
  • 광복 뒤 - 평안남도 건국 준비 위원회 위원장이 되었고, 1945년 11월 조선 민주당을 세웠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에 따른 신탁 통치에 반대하다 1946년 1월 소련군에 의해 평양 고려 호텔에 연금되었다. 6.25 전쟁 중 북한군이 평양에서 물러날 때 총살된 것으로 전한다.[1]

1970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2]

1920년대 실력 양성 운동 인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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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활동
조만식 평양 조선 물산 장려회, '내 살림 내 것으로'
이상재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 대표
방정환 천도교 소년회, 어린이날, 잡지 『어린이』
이승훈 오산 학교 설립, 3.1 운동 민족 대표
강주룡 평원 고무 공장 파업 때 을밀대 지붕에서 고공 농성(1931)
  1. ↑ 1.0 1.1 1.2 조만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2.0 2.1 조만식,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