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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三一運動)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을 계기로 한반도 전역과 해외 한인 사회에서 전개된 항일 독립운동이다. 기미독립운동, 독립만세운동이라고도 한다.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 있던 한국인들이 독립국가를 세울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힌 사건으로, 학생과 종교인뿐 아니라 농민·상인·노동자·여성 등 여러 계층이 참여했다.[1]

운동은 곧바로 독립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독립운동의 기반을 넓혔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군경을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한 뒤 식민 통치 방식을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꾸었다. 독립선언을 준비한 지도자들의 활동과 각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조직한 시위를 함께 살펴야 운동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다.

식민 지배와 국제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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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 피탈 이후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을 앞세운 무단통치를 시행했다. 언론·집회·결사의 자유가 억압되었고, 토지·산업의 재편과 민족 차별 속에서 농민과 노동자의 불만이 쌓였다. 국내의 비밀결사와 해외 독립운동 단체는 이러한 상황에서 활동을 계속했다.[2]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세계 질서를 새로 짜야 한다는 논의가 확산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러시아 혁명이 내세운 민족 해방의 원칙은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다만 민족자결이라는 구호가 모든 식민지의 독립을 강대국들이 보장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한국인들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스스로 독립의 의사를 표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3]

2.8 독립선언과 고종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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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생들은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유학생들의 연락과 귀국은 국내 학생·종교계의 준비를 촉진했다. 선언은 일본의 통치 아래 있는 한국인의 의사와 독립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려는 시도이기도 했다.[4]

한편 고종이 사망하자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져 반일 감정이 높아졌다. 고종의 장례를 보려고 지방에서 많은 사람이 서울로 모인 것도 운동 확산의 조건이 되었다. 독살설이 당시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과 실제 사인이 독살이었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5]

준비와 독립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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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계와 학생의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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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손병희·최린 등과 기독교의 이승훈 등은 각각 준비하던 독립운동을 합쳤다. 불교계의 한용운과 백용성도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민족대표는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 모두 33명이 되었다. 선언서 서명자와 별도로 연락·자금·조직을 맡은 사람들도 있었다. 준비에 관여한 인물까지 포함하는 '민족대표 48인'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차이에서 나온다.[6]

학생들도 전문학교와 중등학교의 연락망을 만들었다. 종교 조직과 학교는 감시 아래에서도 지역 사이를 잇고 사람을 모을 수 있는 기반이었다. 학생 지도자들은 체포에 대비하여 뒤를 이을 책임자를 정하고, 종교계와 협력하면서 후속 시위를 준비했다. 따라서 운동 전체가 선언서 서명자 33명의 지휘만으로 움직였던 것은 아니다.[6]

기미독립선언서의 초안은 최남선이 작성했고, 천도교 계열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이종일의 책임 아래 인쇄했다. 선언서는 조선이 독립국이며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밝히고, 민족의 자유를 인류 평등과 세계 평화의 문제에 연결했다. 부속된 공약삼장은 의사를 끝까지 밝히되 질서를 존중하는 행동을 요구했다.[7]

선언서와 일본 정부 등에 보내는 통고문, 파리 평화회의 등에 보내는 청원문은 서로 목적이 다른 문서였다. 독립을 타국에 청원하는 활동과 한국인 스스로 독립을 선언하는 활동이 함께 추진된 것이다. 인쇄된 선언서는 종교계와 학생들의 연락망을 따라 서울과 지방으로 전달되었다.

태화관과 탑골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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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원래 계획한 탑골공원 대신 인사동 태화관에 모였다. 서명자 33명 가운데 이날 태화관에 참석한 사람은 29명이었다. 이들은 독립선언 사실을 알리고 경찰에 체포되었다. 선언서를 실제로 낭독했는지에 대해서도 참가자 기록 사이에 차이가 있으므로 당시 절차를 하나의 회고만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8]

탑골공원에서는 대표들을 기다리던 학생과 시민이 독립선언식을 열고 거리로 나왔다. 군중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서울 시내를 행진했고, 상인과 장례를 보러 온 사람들도 합류했다. 민족대표들의 체포로 운동이 끝난 것이 아니라 거리의 참가자들이 시위를 이어갔다는 점이 두 장소의 관계에서 드러난다.[9]

전국으로의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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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에는 서울 이외에도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지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이후 철도와 도로, 종교 조직, 학교, 장시를 따라 소식이 전달되었다. 지방의 만세운동은 서울의 지시를 기다리기보다 각 지역 인물과 주민이 계획하여 벌인 경우가 많았다. 도시에서 시작된 시위는 농촌과 장터로 퍼졌고, 장날의 군중과 마을 공동체가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10]

행진과 만세 외침만이 저항 방식은 아니었다. 상인들의 철시, 학생들의 동맹휴학, 유인물 배포, 산 위에서 봉화를 올리는 만세운동 등이 나타났다. 일부 지역에서는 군경의 발포와 검거에 맞서 관공서를 공격하는 등 충돌이 격렬해졌다. 지도부가 내건 비폭력 원칙과 실제 현장에서 나타난 여러 행동을 구분하여 보아야 한다. 시위는 특히 3~4월에 집중되었으나 이후에도 저항이 이어졌다.[10]

시기 주요 움직임
1919년 2월 8일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
3월 1일 태화관 독립선언, 탑골공원과 여러 도시의 만세시위
3~4월 농촌·장터를 포함한 전국 시위와 해외 한인 사회의 호응
4월 14~16일 필라델피아 한인대회
4월 15일 제암리 학살
1919년 9월 여러 임시정부의 통합

국내의 소식은 만주와 연해주 등 한인 이주 지역에도 전달되었다. 북간도 룽징에서는 3월 13일 독립축하회와 시위가 열렸다. 해외 운동도 현지 당국과 일본의 압력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1]

미주 한인들은 집회와 모금, 신문 발행과 외교 선전에 나섰다. 1919년 4월 14~16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대회에서는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했다. 서재필 등은 한국통신부와 출판물을 통하여 미국 여론에 호소했다. 국내 시위와 해외의 재정·외교 활동이 연결된 것이다.[11]

일본은 경찰과 헌병뿐 아니라 군대를 투입하여 시위를 진압했다. 발포·구타·검거·고문과 마을 방화가 벌어졌다. 제암리 학살 사건은 시위 현장에서의 충돌이 아니라 지역 주민을 상대로 한 보복 학살이었다. 1919년 4월 15일 일본군은 지금의 화성시 제암리에서 주민들을 교회당에 모이게 한 뒤 살해하고 불을 질렀다. 선교사 스코필드 등의 현장 조사와 사진·보고서는 탄압 실태를 국외에 알리는 자료가 되었다.[12]

참가자와 희생자의 총수는 자료의 성격과 집계 범위에 따라 다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소개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통계는 회집 인원 202만 3,098명, 사망 7,509명, 부상 1만 5,961명, 피검 4만 6,948명이다. 이는 해당 사료의 집계이며, 오늘날의 완전한 전수조사로 확정된 숫자처럼 다루어서는 안 된다. 시위 참가 횟수와 실제 개인 수, 검거와 기소 인원도 서로 다른 항목이다.[1]

임시정부와 공화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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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계기로 국내외에 임시정부가 세워졌고, 1919년 9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합되었다. 주권 회복을 요구하는 운동은 군주를 되세우는 데 머물지 않고 민주공화제를 채택하는 정치적 방향으로 나아갔다. 임시정부의 활동에는 여러 독립운동 세력이 참여했으며, 통합 이후에도 노선과 조직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되었다.[13]

문화통치로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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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바꾸고 제한적으로 신문 발행과 문화 활동을 허용하는 문화통치를 내세웠다. 그러나 독립이나 정치적 자치가 허용된 것은 아니었다. 회유와 분할 지배를 결합한 정책 아래 한국인들은 제한된 활동 공간에서 교육·언론·사회운동을 확대해 나갔다. 통치 방식의 변화와 식민 지배의 지속을 함께 보아야 한다.[14]

국제사회의 반응과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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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의 선교사·언론인·정치인 일부는 탄압을 비판했다. 그러나 동정적 여론이 곧 강대국 정부의 독립 승인이나 개입을 뜻하지는 않았다. 미국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와 동아시아 정책을 우선했으며, 한국 문제에 개입하여 독립을 보장하지 않았다. 운동 이후 독립운동가들이 외교·실력양성·무장투쟁 등 여러 방법을 모색한 배경에는 이러한 국제 질서의 제약이 있었다.[15]

이미륵은 학생으로서 운동에 참여한 경험을 뒤에 《압록강은 흐른다》에 담았다. 작품 속 탑골공원의 군중과 행진 묘사는 참여자의 기억을 보여 주지만, 문학적 재구성과 사건 당시의 행정·재판 기록은 자료의 성격이 다르다. 운동의 경과를 복원할 때에는 회고와 공문서, 지역 기록을 서로 대조할 필요가 있다.[9]

  1. ↑ 1.0 1.1 1.2 3·1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7 확인.
  2. ↑ 국내 상황, 《신편 한국사》 47권,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17 확인.
  3. ↑ 해방과 평등의 새로운 사조 등장, 《신편 한국사》 47권,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17 확인.
  4. ↑ 2·8독립선언, 《신편 한국사》 47권,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17 확인.
  5. ↑ 광무황제의 붕어와 인산, 《신편 한국사》 47권,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17 확인.
  6. ↑ 6.0 6.1 민족대연합전선의 형성, 《신편 한국사》 47권,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17 확인.
  7. ↑ 독립선언서 준비, 《신편 한국사》 47권,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17 확인.
  8. ↑ 민족대표의 독립선언, 《신편 한국사》 47권,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17 확인.
  9. ↑ 9.0 9.1 만세시위운동의 시작, 《신편 한국사》 47권,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17 확인.
  10. ↑ 10.0 10.1 시위의 전국확산, 《신편 한국사》 47권,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17 확인.
  11. ↑ 미주, 《신편 한국사》 47권,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17 확인.
  12. ↑ 수원 제암리 참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7 확인.
  13.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신편 한국사》 47권,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17 확인.
  14. ↑ 무단지배체제의 후퇴, 《신편 한국사》 47권,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17 확인.
  15. ↑ 미국, 《신편 한국사》 47권,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17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