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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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壬午軍亂, 1882)은 밀린 급료와 차별 대우에 분노한 구식 군인들이 도시 빈민과 함께 일으킨 봉기로, 흥선 대원군이 잠시 재집권했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진압되고 청의 내정 간섭과 제물포 조약을 불러온 사건이다.
- 발단 - 1882년 6월 9일(음력) 선혜청 도봉소에서 겨우 한 달 치 급료로 나눠 준 쌀에 겨와 모래가 섞여 있자 옛 훈련도감 군병들이 관리를 때렸다. 선혜청 당상 민겸호가 주동자를 잡아 가두자 군인들이 들고일어났다.
- 봉기 - 군인들은 운현궁의 흥선 대원군을 찾아가 호소한 뒤 민겸호의 집을 부수고, 별기군 교관 호리모토를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했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는 인천으로 달아났다. 서울의 하층민도 합세했다.
- 궁궐 침입 - 이튿날 창덕궁에 들어가 민겸호·김보현 등을 죽였고, 왕비(명성 황후)는 궁을 빠져나가 충주 장호원으로 피신했다.
- 대원군 재집권 - 고종은 사태 수습을 대원군에게 맡겼다. 대원군은 통리기무아문과 별기군을 없애고 5군영을 되살렸으며, 왕비의 국상을 선포했다.
- 청군의 진압 - 민씨 세력의 요청으로 청은 오장경이 이끄는 군대를 보내 군란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톈진으로 압송했다.
- 제물포 조약 - 1882년 7월(음력) 일본과 맺었다. 일본에 배상금을 물고, 공사관 경비를 구실로 일본군이 서울에 주둔하게 되었으며, 사과 사절(수신사 박영효)을 보냈다.
- 청의 내정 간섭 -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청군이 서울에 머물렀고, 마젠창과 묄렌도르프가 내정·외교 고문으로 왔다.
-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 - 1882년 체결했다. 청 상인이 한성과 양화진에 점포를 열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을 청의 속방으로 명시하고 청 상인의 내륙 통상을 허용해 청 상인의 진출이 크게 늘었다.
- 개화파의 분화 - 청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점진적으로 개혁하려는 온건 개화파와, 청의 간섭을 벗어나 급진 개혁을 하려는 급진 개화파로 나뉘었다. 이 대립이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