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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壬午軍亂, 1882)은 밀린 급료와 차별 대우에 분노한 구식 군인들이 도시 빈민과 함께 일으킨 봉기로, 흥선 대원군이 잠시 재집권했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진압되고 청의 내정 간섭과 제물포 조약을 불러온 사건이다.

1876년 개항 이후 정부는 통리기무아문을 두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만드는 등 개화 정책을 폈다. 1881년 5군영을 무위영·장어영의 2영으로 줄이면서 구식 군인은 줄어들고, 일본인 교관이 훈련하는 별기군에 비해 낮은 대우를 받았다. 급료도 13개월이나 밀려 있었다.[1]

  • 발단 - 1882년 6월 9일(음력) 선혜청 도봉소에서 겨우 한 달 치 급료로 나눠 준 쌀에 겨와 모래가 섞여 있자 옛 훈련도감 군병들이 관리를 때렸다. 선혜청 당상 민겸호가 주동자를 잡아 가두자 군인들이 들고일어났다.
  • 봉기 - 군인들은 운현궁의 흥선 대원군을 찾아가 호소한 뒤 민겸호의 집을 부수고, 별기군 교관 호리모토를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했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는 인천으로 달아났다. 서울의 하층민도 합세했다.
  • 궁궐 침입 - 이튿날 창덕궁에 들어가 민겸호·김보현 등을 죽였고, 왕비(명성 황후)는 궁을 빠져나가 충주 장호원으로 피신했다.
  • 대원군 재집권 - 고종은 사태 수습을 대원군에게 맡겼다. 대원군은 통리기무아문과 별기군을 없애고 5군영을 되살렸으며, 왕비의 국상을 선포했다.
  • 청군의 진압 - 민씨 세력의 요청으로 청은 오장경이 이끄는 군대를 보내 군란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톈진으로 압송했다.
  • 제물포 조약 - 1882년 7월(음력) 일본과 맺었다. 일본에 배상금을 물고, 공사관 경비를 구실로 일본군이 서울에 주둔하게 되었으며, 사과 사절(수신사 박영효)을 보냈다.
  • 청의 내정 간섭 -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청군이 서울에 머물렀고, 마젠창과 묄렌도르프가 내정·외교 고문으로 왔다.
  •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 - 1882년 체결했다. 청 상인이 한성과 양화진에 점포를 열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을 청의 속방으로 명시하고 청 상인의 내륙 통상을 허용해 청 상인의 진출이 크게 늘었다.
  • 개화파의 분화 - 청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점진적으로 개혁하려는 온건 개화파와, 청의 간섭을 벗어나 급진 개혁을 하려는 급진 개화파로 나뉘었다. 이 대립이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이어졌다.

다른 사건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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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건
구식 군인 봉기, 일본 공사관 습격, 제물포 조약 체결, 대원군 청 압송 임오군란(1882)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일어남, 14개조 정강, 입헌 군주제 지향, 한성 조약·톈진 조약 갑신정변(1884)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미군이 강화도 침입, 이후 전국에 척화비 건립 신미양요(1871)
고종 강제 퇴위·군대 해산에 맞서 13도 창의군 결성 항일 의병 운동(정미의병, 1907)
황사영이 베이징 주교에게 서양 군대 출병을 요청하는 백서를 씀 신유박해(1801)
  1. ↑ 임오군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