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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군영(五軍營)은 조선 후기 임진왜란 중에 세운 훈련도감을 시작으로 어영청·총융청·수어청·금위영이 차례로 갖추어진 다섯 군영으로, 수도 한성과 그 외곽을 지키는 중앙 군사 조직이었다. 오군영이라고도 쓴다.

조선 전기의 중앙군인 5위는 양인 농민이 번갈아 복무하는 체제였으나 16세기에 이름만 남았고, 임진왜란 뒤 이것으로는 서울을 지키기 어렵다는 위기감이 커졌다. 그래서 필요할 때마다 새 군영을 세웠고, 금위영 설치로 5군영 체제가 완성되었다.[1]

  • 훈련도감(1593, 선조) - 류성룡의 건의로 세워, 포수·살수·사수의 삼수병을 기르고 급료를 주는 상비군으로 운영했다.
  • 어영청(1623, 인조) - 인조반정 뒤 후금에 대비해 이귀가 모은 정예병이 모체였다. 1624년 이괄의 난 때 공주로 피난한 인조를 지킨 어영군이 바탕이 되어 상설 군영이 되었다.
  • 총융청(1624, 인조) - 이괄의 난을 계기로 경기도 일대의 방어를 위해 세웠다. 경기 관찰사 이서가 경기 속오군을 묶어 이끌었다.
  • 수어청(1626, 인조) - 남한산성을 고쳐 쌓고 이를 중심으로 경기 남부를 지키게 했다.
  • 금위영(1682, 숙종) - 병조에 속한 정초군과 훈련도감의 훈련별대를 합쳐 세웠다.[2]
  • 역할 -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은 궁궐과 도성을 지켜 삼군문이라 불렀고, 총융청과 수어청은 수도 외곽을 맡았다.
  • 재정 - 훈련도감 군사는 급료병이었고, 어영청과 금위영은 지방 군사가 번갈아 올라와 근무하며 정부가 배정한 보인이 그 비용을 댔다. 번상 비용과 급료 부담이 커서 흉년에는 훈련도감을 뺀 군영의 번상을 멈추기도 했다.[1]
  • 편제 - 훈련도감이 처음 쓴 영-사-초-기-대-오의 속오법 편제를 다른 군영도 따랐다.[2]

5군영은 1881년(고종 18) 개화 정책으로 무위영과 장어영의 2영으로 통합되었다. 이때 밀려난 구식 군인들의 불만이 이듬해 임오군란으로 터졌고, 군란 중 흥선 대원군이 잠시 5군영을 되살렸다.

조선의 군사 조직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조직 때 특징
5위 조선 전기 양인 농민의 의무병으로 이루어진 중앙군
5군영 조선 후기 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수어청·금위영
속오군 임진왜란 이후 양반부터 노비까지 묶은 지방군
장용영 정조 국왕 친위 군영 (→ 정조 (조선))
별기군 1881년 일본인 교관이 훈련한 신식 군대
  1. ↑ 1.0 1.1 5군영, 교과서 용어 해설,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8 확인.
  2. ↑ 2.0 2.1 오군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