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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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는 조선의 제16대 왕으로, 1623년 서인이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즉위해 친명배금 정책을 폈다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했으며, 안으로는 어영청·총융청·수어청을 두고 영정법을 시행했다.
- 정묘호란(1627) - 반정 세력은 광해군이 후금과 관계를 끊지 못한 것을 비판하며 명을 가까이하고 후금을 멀리했다. 1627년 후금이 쳐들어오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란했고, 정봉수(용골산성)·이립 등의 의병이 맞섰다.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는 화약으로 끝났다.
- 병자호란(1636~1637) - 청이 형제 관계를 군신 관계로 바꾸자고 요구하자 조선은 거부했다. 1636년 12월 청 태종이 직접 쳐들어오자 인조는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에서 버텼다. 김준룡이 광교산에서 싸웠으나 포위를 풀지 못했고, 강화도가 함락되자 1637년 1월 30일(음력) 남색 옷 차림으로 서문을 나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 의례를 치렀다.[2]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척화를 주장한 신하들이 심양에 볼모로 끌려갔다.[1]
- 어영청 - 즉위 직후 후금에 대비해 어영군을 만들고 이괄의 난 뒤 규모를 키웠으며, 정묘호란 뒤 어영청으로 조직했다.
- 총융청(1624) - 이괄의 난으로 왕을 지킬 힘이 약하다는 것이 드러나자, 경기 관찰사 이서에게 경기 일대의 속오군을 묶어 수도 외곽을 지키게 했다. 1624년 6월 이서를 기보총융사로 삼으면서 총융군이 제도화되었다.[3]
- 수어청(1626) - 1624년부터 이서의 감독 아래 승려들을 동원해 남한산성을 고쳐 쌓아 1626년 11월 일단 완성했다. 『속대전』은 이때 수어청을 두어 남한산성과 광주 일대를 지키게 했다고 적지만, 당시의 기록에서는 설치 기사가 확인되지 않는다. 체제가 갖추어진 것은 정묘호란 뒤이다.[4]
이로써 임진왜란 중에 세운 훈련도감과 함께 5군영 가운데 네 군영이 인조 때까지 갖추어졌다.(→ 5군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