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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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 대학살(關東大虐殺, 1923)은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 지방에 대지진이 일어난 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 속에서 일본의 군대·경찰과 민간 자경단이 한국인 수천 명과 일본인 사회주의자 등을 학살한 사건이다. '간토 대학살', '관동 대지진 한국인 학살'이라고도 한다.
1923년 9월 1일 도쿄와 가나가와현 일대를 규모 7.9의 대지진이 덮쳐 큰 화재가 나고 10만 명이 넘게 숨졌다. 혼란 속에 "조선인이 방화한다", "우물에 독을 탔다"는 소문이 퍼졌고, 일본 내무성은 9월 2~3일 경보국장 명의로 조선인의 방화·폭동을 경계하라는 전문을 전국 지방 장관과 조선 총독부에까지 보냈다. 9월 2일 도쿄에 계엄령이 내려졌고 3~4일에는 가나가와·사이타마·지바현으로 넓혀졌다. 이런 가운데 군대와 경찰, 주민이 만든 자경단이 한국인을 붙잡아 죽였다.[1]
- 학살의 주체 - 백과사전은 도쿄와 가나가와현에서는 군대와 경찰이 중심이 되었고, 지바·사이타마현에서는 자경단이 주로 학살을 저질렀다고 정리한다. 자경단은 죽창·일본도·곤봉 따위를 들고 검문소를 세워 한국인을 가려냈으며, 경찰서로 피한 사람까지 쫓아 들어가 죽였다.[1]
- 일본 정부의 조사 - 일본 내각부 중앙 방재 회의의 보고서(2009)도 지진 직후 조선인이 봉기·방화한다는 유언비어가 퍼졌고, 자경단과 군대·경찰 일부가 살상 사건을 일으켰으며, 3일 무렵까지는 군과 경찰도 유언비어에 휩쓸려 이를 오히려 부풀렸다고 적었다.[2]
- 희생자 수 - 정확한 수는 밝혀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신문』 특파원 조사는 도쿄 752명, 가나가와현 1,052명 등 모두 6,661명이 피살되었다고 전했다. 백과사전은 이 수치를 소개하며 시신조차 찾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고 적었다.[1]
- 은폐 - 일본 정부는 10월 20일에야 보도 금지를 풀었으나, 군대·관헌의 학살은 감추고 책임을 자경단에 돌렸다. 일부 자경단원이 재판에 넘겨졌으나 처벌은 형식에 그쳤다.
지진 직후인 9월 7일 일본은 치안을 해치는 말을 퍼뜨리면 처벌하는 긴급 칙령을 공포했는데, 이것이 1925년 치안 유지법의 전신이 되었다.[1] 이 사건은 재일 한국인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국외 이주 동포가 겪은 대표적인 시련으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