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대표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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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대표 회의(國民代表會議, 1923)는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중국 상하이에서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 대표들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앞날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한 회의로, 임시정부를 고쳐 쓰자는 개조파와 새 기관을 만들자는 창조파가 맞서다 결렬되었다.
1919년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대 들어 큰 어려움에 빠졌다. 일제가 연통제와 교통국 조직을 찾아내 국내와의 연락망이 끊겼고, 자금도 바닥났다. 대통령 이승만이 1919년 미국에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를 청원했던 일이 알려지자 신채호·박용만 등 무장 투쟁론자들이 거세게 반발했고, 외교 독립론과 무장 투쟁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갈등도 깊어졌다. 1921년 박은식·김창숙 등이 '우리 동포에게 고함'을 발표해 독립운동 전체의 대표 회의를 열자고 촉구했고, 베이징의 군사 통일 회의 세력과 안창호 등이 이에 호응해 국민 대표 회의 주비회가 꾸려졌다.[1]
- 개막 - 여러 차례 미루어진 끝에 1923년 1월 3일 개막했다. 국내·상하이·만주·베이징·간도·연해주·미주 등지의 120여 개 단체에서 120여 명의 대표가 모였다. 안창호가 임시 의장으로 예비 회의를 이끌었고, 1월 31일부터 김동삼을 의장으로 본회의가 열렸다.[1]
- 개조파 - 임시정부를 그대로 두되 조직과 운영을 실정에 맞게 고쳐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으로 삼자고 했다. 안창호 중심의 서북파 민족주의 세력, 서간도의 김동삼 등 서로 군정서 세력, 상하이파 고려 공산당 세력이 이쪽에 섰다.
- 창조파 -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기관)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자고 했다. 신채호·문창범·원세훈과 이르쿠츠크파 고려 공산당 세력이 중심이었다.[2]
- 결렬 - 3월 임시정부 개조안이 올라오자 대립이 더 격해졌다. 5월 15일 김동삼 등 만주 대표들이 소속 단체의 소환 통지를 받고 사임했고, 이튿날 개조파 대표들이 탈퇴를 선언하고 퇴장했다. 남은 창조파는 6월 7일 국호를 '한(韓)'으로 하는 국민 위원회를 조직하고 헌법을 정한 뒤 폐회했다.
- 국민 위원회의 해산 - 창조파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 소련과 코민테른의 지원을 구했으나 인정받지 못했고, 국민 위원회는 1924년 2월 해산되었다.[2]
회의가 깨지면서 많은 독립운동가가 임시정부를 떠났고, 임시정부는 한동안 상하이의 작은 단체 수준으로 위축되었다. 남은 세력은 임시 의정원을 통해 정부를 고쳐 나갔다. 1925년 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해 면직하고 박은식을 제2대 대통령으로 뽑았으며, 대통령제를 국무령 중심의 내각 책임제로 바꾸었다. 한편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묶으려는 노력은 1920년대 후반 중국 관내의 유일당 운동과 국내의 신간회로 이어졌다.
회의 날짜와 규모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개조파의 회의 거부로 사실상 결렬된 날을 5월 15일로 적고, 『신편 한국사』는 5월 15일 김동삼 등의 사임과 5월 16일 개조파의 탈퇴 선언을 나누어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