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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감(國子監)은 992년(성종 11) 고려가 관리가 될 인재를 기르려고 개경에 세운 최고 국립 교육 기관으로, 유학부와 기술학부를 갖춘 종합 대학의 성격을 띠었다.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유교 정치 이념에 바탕을 둔 통치 체제를 정비하면서 국자감을 세우고, 지방 12목에는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보내 교육을 맡겼다. 국자감은 과거와 연결된 교육 기관이라는 점에서 고대의 국학·태학과 성격이 달랐다.[1]

인종 때 정비된 국자감의 학부는 아버지의 품계에 따라 입학 자격이 달랐다.

  • 유학부 - 국자학(3품 이상 관리의 자제), 태학(5품 이상), 사문학(7품 이상). 『논어』·『효경』을 필수로 하고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 기술학부 - 율학(법률)·서학(글씨)·산학(계산). 8품 이하 관리의 자제와 일반 서민이 입학했다.

문종 무렵 최충이 세운 문헌공도(9재 학당)를 비롯한 사학 12도가 번성하면서 과거 준비생이 사학으로 몰리고 관학이 위축되었다. 이에 예종과 인종이 관학을 되살리려 했다.

  • 7재 - 1109년(예종 4) 국자감 안에 설치한 전공별 강좌. 주역·상서·모시·주례·대례·춘추를 가르치는 6재와 무학을 가르치는 강예재로 이루어졌다. 승보시에 합격해야 들어갈 수 있었고, 우수한 학생은 과거 응시에 특전을 받았다.
  • 양현고 - 1119년(예종 14) 설치한 장학 재단. 국자감 학생의 식량과 학용품을 마련했다.[2]
  • 청연각·보문각 - 예종이 궁 안에 세운 도서관 겸 학문 연구 기관.
  • 경사 6학 정비 - 인종 때 학부와 입학 자격을 정비했다.
  • 섬학전 - 충렬왕 때 안향의 건의로 관리들에게서 거둔 교육 기금.
  • 1275년(충렬왕 1) 원의 간섭으로 국학으로 이름을 낮추었다.
  • 1298년 충선왕이 성균감으로, 1308년 다시 성균관으로 바꾸었다.
  • 1356년(공민왕 5) 반원 개혁 때 국자감으로 되돌렸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이라 했다.
  • 1367년 공민왕이 성균관을 다시 짓고 기술학부를 떼어 내 순수한 유학 교육 기관으로 만들었다. 이색이 대사성을 맡고 정몽주·정도전 등이 가르치며 성리학 보급의 중심이 되었다. 이것이 조선의 성균관으로 이어졌다.

다른 교육 기관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실 교육 기관
7재 설치, 양현고 설립, 경사 6학 국자감(고려)
신문왕이 설치, 박사와 조교가 유학 교육 국학(통일 신라)
생원·진사에게 입학 자격 성균관(조선)
지방의 부·목·군·현에 하나씩 둠 향교
최충의 9재 학당 등 사학 12도(고려)
  1. ↑ 국자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2. ↑ 양현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