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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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國學)은 682년(신문왕 2) 신라가 예부에 속하게 하여 세운 국립 유학 교육 기관으로, 박사와 조교가 귀족 자제에게 『논어』·『효경』 등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삼국 통일 뒤 신문왕은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고 진골 귀족 세력을 누르며 왕권을 강화했다. 왕권 중심의 통치 체제를 운영하려면 유교 정치 이념을 익힌 관리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세운 것이 국학이다. 앞서 김춘추가 648년 당에 가서 국학의 석전과 강론을 보고 왔고, 651년 진덕 여왕 때 실무직인 대사를 먼저 두었다. 682년 책임자인 경(卿)을 두면서 제도가 완비되었다. 고구려가 372년(소수림왕 2) 태학을 세운 지 300여 년 뒤의 일이다.[1]
- 소속 - 예부에 속했다.
- 관직 - 책임자 경 1명, 실제로 가르치는 박사와 조교, 서무를 맡은 대사 2명 등을 두었다. 경의 관등이 아찬 이하여서 6두품도 맡을 수 있었다. 설총이 '방언으로 9경을 읽어 후생을 가르쳤다'는 기록도 국학 교육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 학생 - 대사 이하의 관등을 가졌거나 관등이 없는 15~30세의 귀족 자제가 입학했다. 9년을 기한으로 공부했고, 마치면 나마·대나마의 관등을 받았다.
- 교과 - 『논어』와 『효경』을 공통 필수로 하고, 『예기』·『주역』·『춘추좌씨전』·『모시』·『상서』·『문선』을 나누어 가르쳤다. 산학 등 기술 교육도 했다.
- 이름 변화 - 경덕왕 때 태학감으로 바꾸었다가 혜공왕 때 다시 국학이라 불렀다.
788년(원성왕 4) 국학 학생의 유교 경전 이해 정도를 상·중·하 세 등급으로 나누어 관리 채용에 참고하게 했다. 시험으로 관리를 뽑는 본격적인 과거는 고려 광종 때인 958년에 처음 실시되었다(→ 과거 제도).
- 상품 - 『춘추좌씨전』·『예기』·『문선』을 읽어 뜻에 능통하고 『논어』·『효경』에도 밝은 사람.
- 중품 - 『곡례』·『논어』·『효경』을 읽은 사람.
- 하품 - 『곡례』·『효경』을 읽은 사람.
- 오경·삼사·제자백가에 두루 통하면 등급을 뛰어넘어 뽑았다.
진골 귀족의 반발과 골품제의 벽 때문에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신라 하대에는 당으로 유학하는 사람이 늘면서 국학의 비중이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