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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자강회(大韓自强會, 1906~1907)는 을사늑약 뒤인 1906년 헌정 연구회를 이어 장지연·윤효정 등이 교육과 식산흥업으로 자강을 이루어 국권을 되찾자며 조직한 애국 계몽 단체이다.

1906년 3월 31일 장지연·윤효정·심의성·임진수·김상범 다섯 사람이 발기하고, 4월 14일 임시회에서 임원을 뽑아 정식으로 출범했다. 나라의 독립은 스스로 강해지는 데 달려 있다는 자강 독립론을 내세웠으며, 헌정 연구회를 모체로 하고 황성신문·제국신문 쪽 인사들과도 이어졌다. 일본인 오가키 다케오가 고문으로 참여한 점을 두고는 평가가 엇갈린다.[1] 회장은 윤치호였다.[2]

  • 계몽 활동 - 본회에 교육부와 식산부를 두고, 달마다 일반인도 들을 수 있는 연설회를 열었으며 『대한 자강회 월보』를 펴냈다.
  • 정부 건의 - 의무 교육 실시, 사범 학교 설립, 조혼 금지 등을 정부에 건의했다.
  • 지회 - 지방에 지회를 두었는데, 절차가 까다로워 1907년 5월 무렵 25곳 정도였다.
  • 국채 보상 운동 - 1907년 국채 보상 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로 결의했다.

국채 보상 운동 뒤 현실 참여가 늘었고,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이 강제로 물러나자 별보와 연설회로 양위 반대·배일 운동을 벌였다.[3] 같은 해 7월 공포된 보안법은 내부대신이 결사를 해산시킬 수 있게 했는데,[4] 대한 자강회는 1907년 8월(우리역사넷 연대기는 8월 21일) 이완용 내각의 지시로 내부대신 명의의 해산 명령을 받았다.[2] 같은 해 11월 세워진 대한 협회가 그 흐름을 이었다.

  1. ↑ 가. 대한자강회의 설립, 『신편 한국사』 43권 국권회복운동,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18 확인.
  2. ↑ 2.0 2.1 대한자강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3. ↑ 대한자강회 1906~1907, 한국사 연대기,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18 확인.
  4. ↑ 보안법, 교과서 용어해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