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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新民會)는 1907년 안창호·양기탁 등이 국권 회복과 공화정 국가 수립을 목표로 서울에서 조직한 비밀 결사로, 교육·산업·출판을 통한 실력 양성 운동과 국외 독립군 기지 건설을 함께 추진했다.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가 『대한매일신보』 주필 양기탁에게 제안해 1907년 4월 무렵 세웠다. 총감독은 양기탁, 총서기는 이동녕, 재무는 전덕기, 집행원은 안창호가 맡았고 신채호·이갑·이승훈 등이 참여했다. 회원 다수가 독립 협회의 청년 회원 출신이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 비밀 결사로 운영했으며, 1910년 무렵 회원이 약 800명에 이르렀다.[1]

  • 공화정 - 국권을 되찾은 뒤 입헌 군주국이 아닌 공화국을 세우자고 했다. 독립 협회가 입헌 군주제를 목표로 한 것과 다르다.
  • 실력 양성 - 국민을 새롭게 하는 '신민'으로 민력을 길러야 국권을 되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 교육 - 평양에 대성 학교(안창호), 정주에 오산 학교(이승훈)를 세웠다.
  • 출판 - 평양·서울·대구에 출판사 겸 서점인 태극 서관을 세워 책을 보급했다. 『대한매일신보』를 사실상 기관지로 삼았다.
  • 산업 - 평양에 자기 회사를 세웠다.
  • 청년 학우회 - 1909년 청년 수양 단체를 만들었다.
  • 국외 독립군 기지 - 1910년 무렵 무장 독립 전쟁 노선을 정하고, 이회영 형제·이상룡 등이 만주 삼원보에 경학사와 신흥 강습소(뒤의 신흥 무관 학교)를 세웠다.

1911년 일제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를 꾸며 내 600여 명을 붙잡고 120여 명을 기소했으며, 1심에서 105명이 유죄를 선고받았다(105인 사건). 이 사건으로 조직이 드러나 신민회는 해체되었다.

애국 계몽 단체와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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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단체
비밀 결사, 공화정 지향, 대성 학교·태극 서관, 105인 사건으로 해체 신민회
독립문 건립, 만민 공동회, 헌의 6조 독립 협회
고종 강제 퇴위 반대 운동으로 해산(1907) 대한 자강회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저지 보안회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1933) 조선어 학회
  1. ↑ 신민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