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 계몽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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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 계몽 운동(愛國啓蒙運動)은 1904년 무렵부터 1910년 국권 피탈 때까지 지식인과 개화파 관료들이 교육·언론·산업을 일으켜 실력을 기름으로써 국권을 지키고 되찾으려 한 민족 운동이다.
- 보안회(1904) - 일본이 전국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자 1904년 7월 송수만·심상진 등이 서울 종로에서 집회를 열어 조직했다. 연일 반대 집회를 열고 상인들도 철시하며 호응하자, 일본은 헌병을 동원해 탄압하면서도 결국 요구를 거두어들였다. 같은 무렵 이도재 등은 우리 손으로 황무지를 개간하겠다며 농광 회사를 세웠다.[2]
- 헌정 연구회(1905) - 이준·윤효정·양한묵 등이 입헌 정치 체제를 연구하고 국민의 정치의식을 높이려 세웠다. 친일 단체인 일진회와 맞섰으며, 을사늑약 뒤 대한 자강회로 이어졌다.
- 대한 자강회(1906) - 을사늑약 뒤 헌정 연구회를 이어 윤치호·장지연·윤효정 등이 조직했다. 교육 진흥과 식산흥업으로 자강을 이루자고 주장하며 지회를 두고 『대한 자강회 월보』를 펴냈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헤이그 특사 사건의 결과)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다가, 같은 해 8월 일제가 보안법을 적용해 강제로 해산시켰다.
- 대한 협회(1907) - 대한 자강회를 이어 오세창·권동진 등이 세웠다. 교육과 산업 진흥을 내걸었으나 점차 친일적 성향을 띠었다.
- 신민회(1907) - 안창호·양기탁 등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비밀 결사로 조직했다. 공화정을 지향하고 대성 학교·오산 학교, 태극 서관, 국외 독립군 기지 건설을 추진하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해체되었다.
- 학회 - 서북 학회, 기호 흥학회, 호남 학회 등 지역 학회가 학교를 세우고 학회지를 펴냈다.
일제는 1907년 신문지법과 보안법, 1908년 사립 학교령과 학회령, 1909년 출판법으로 언론·결사·교육을 억눌렀다. 실력 양성을 앞세운 나머지 의병 투쟁을 비판하거나 일본의 보호를 받아들이는 경향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때 길러진 인재와 교육·언론 기반은 일제 강점기 민족 운동의 밑바탕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