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메뉴 여닫기
환경 설정 메뉴 여닫기
개인 메뉴 여닫기
로그인하지 않음
지금 편집한다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될 수 있습니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조선 후기 효종~숙종 때의 문신·성리학자로, 기축봉사를 올려 명에 대한 의리와 청에 대한 복수(북벌)를 내세웠고, 서인 산림의 영수로 예송을 이끌었으며 노론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본관은 은진, 호는 우암이다. 아버지에게 이이의 『격몽요결』 등을 배워 주희와 이이의 학문을 모범으로 삼았고, 1630년부터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과 그 아들 김집에게 배웠다. 1636년 봉림 대군(뒤의 효종)의 스승이 되었고, 병자호란 때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삼전도 항복 뒤 고향으로 물러나 오랫동안 산림으로 지내며 서인 학자들을 이끌었다.[1]

효종 때: 북벌론

편집 원본 편집
  • 기축봉사(1649) - 효종이 즉위한 해에 올린 상소이다. 명이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해 준 은혜(재조지은)를 잊지 말고 청에 당한 치욕을 갚아야 한다는 존주대의와 복수설치를 내세웠다.
  • 정유봉사(1657) - 북벌에 앞서 왕이 마음을 닦고 정치를 바로 해야 한다는 선결 과제를 올리고 다시 조정에 나왔다.
  • 이조 판서(1658) - 공안 개정과 호포제 등 내정 개혁을 건의하고, 효종과 홀로 마주한 자리(기해독대)에서 북벌 계책을 논의했다. 그러나 1659년 효종이 죽어 북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종·숙종 때: 예송과 환국

편집 원본 편집
  • 기해예송(1659) - 효종이 죽자 인조의 계비 자의 대비의 상복 기간을 두고 송시열 등 서인은 1년(기년설), 허목·윤휴 등 남인은 3년을 주장했다.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예송).
  • 갑인예송(1674) - 효종비 인선 왕후가 죽었을 때는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되어 서인이 밀려났고, 송시열은 숙종 초 유배되었다.
  • 경신환국(1680) - 허적·윤휴 등 남인이 쫓겨나자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중용되었다(→ 숙종 (조선)).
  • 노론과 소론의 분열 - 남인 처벌 문제와 제자 윤증과의 갈등 등으로 서인이 갈라질 때 송시열을 따르는 쪽이 노론이 되었다.
  • 기사환국(1689) - 희빈 장씨의 아들(뒤의 경종)을 원자로 정하는 데 반대했다가 제주에 유배되었고,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1694년 갑술환국 뒤 관작이 회복되었다.
  • 이이의 학설을 이어 주자의 학문을 절대시했다. 『삼학사전』을 지어 척화를 주장하다 청에 끌려가 죽은 홍익한·윤집·오달제를 기렸다.
  • 말년에 머문 충청도 괴산 화양동에는 그를 모신 화양동 서원이 섰고, 유언에 따라 제자 권상하가 명의 황제를 제사하는 만동묘를 세웠다(1703). 그는 명이 망한 뒤 조선이 중화를 잇는다는 소중화 의식을 이론으로 다졌다. 화양동 서원은 노론의 근거지로 위세가 컸으나 흥선 대원군 때 철폐되었다(→ 서원).
  • 『송자대전』이 전한다.

비슷한 학자와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활동 인물
기축봉사, 북벌론, 기해예송의 기년설 송시열
해주 향약, 『성학집요』, 『동호문답』 이이
『가례집람』으로 예학 정리, 송시열의 스승 김장생
백운동 서원 건립 주세붕 (→ 서원)
『성학십도』, 예안 향약 이황
기해예송에서 3년설 허목·윤휴 (남인)
  1. ↑ 송시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