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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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조선 후기 효종~숙종 때의 문신·성리학자로, 기축봉사를 올려 명에 대한 의리와 청에 대한 복수(북벌)를 내세웠고, 서인 산림의 영수로 예송을 이끌었으며 노론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 기축봉사(1649) - 효종이 즉위한 해에 올린 상소이다. 명이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해 준 은혜(재조지은)를 잊지 말고 청에 당한 치욕을 갚아야 한다는 존주대의와 복수설치를 내세웠다.
- 정유봉사(1657) - 북벌에 앞서 왕이 마음을 닦고 정치를 바로 해야 한다는 선결 과제를 올리고 다시 조정에 나왔다.
- 이조 판서(1658) - 공안 개정과 호포제 등 내정 개혁을 건의하고, 효종과 홀로 마주한 자리(기해독대)에서 북벌 계책을 논의했다. 그러나 1659년 효종이 죽어 북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기해예송(1659) - 효종이 죽자 인조의 계비 자의 대비의 상복 기간을 두고 송시열 등 서인은 1년(기년설), 허목·윤휴 등 남인은 3년을 주장했다.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예송).
- 갑인예송(1674) - 효종비 인선 왕후가 죽었을 때는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되어 서인이 밀려났고, 송시열은 숙종 초 유배되었다.
- 경신환국(1680) - 허적·윤휴 등 남인이 쫓겨나자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중용되었다(→ 숙종 (조선)).
- 노론과 소론의 분열 - 남인 처벌 문제와 제자 윤증과의 갈등 등으로 서인이 갈라질 때 송시열을 따르는 쪽이 노론이 되었다.
- 기사환국(1689) - 희빈 장씨의 아들(뒤의 경종)을 원자로 정하는 데 반대했다가 제주에 유배되었고,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1694년 갑술환국 뒤 관작이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