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향
IT 위키
더 많은 작업
안향(安珦, 1243~1306)은 고려 충렬왕 때 원에서 주자의 책을 베껴 와 성리학(주자학)을 처음 들여오고, 섬학전을 마련해 국학을 다시 일으킨 문신이자 학자이다.

흥주(지금의 경상북도 영주 순흥) 사람으로 처음 이름은 유(裕)이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섰다. 만년에 주자(회암)의 초상을 걸어 두고 사모하여 호를 회헌(晦軒)이라 했고, 시호는 문성(文成)이다.[1] 무신 집권과 원의 간섭으로 흔들리는 고려를 바로잡을 길을 주자학에서 찾았다.
- 원 방문(1289~1290) - 1289년 정동행성의 관직과 고려유학제거를 맡았고, 그해 11월 충렬왕과 원의 공주를 따라 원에 가서 주자의 책을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초상을 그려 이듬해 돌아왔다.
- 섬학전(1304) - 학교가 쇠퇴하는 것을 걱정해, 6품 이상 관리는 은 1근, 7품 이하는 베를 내게 하여 양현고에 넣고 그 이자로 인재를 기르는 장학 기금인 섬학전을 만들자고 건의했다. 왕도 내고의 돈과 곡식을 보탰다.
- 문묘 정비 - 1303년 국학 학정 김문정을 중국 강남에 보내 공자와 70제자의 초상, 제기·악기, 6경과 여러 책을 구해 오게 했다. 1304년 대성전이 완성되자 이 초상들을 모셨고, 이산·이진을 경사교수도감사로 추천해 경전과 역사를 가르치게 했다.[2]
- 문묘 종사 - 『고려사』는 충숙왕 6년(1319) 그를 문묘에 종사하자는 논의가 일자 섬학전을 건의한 것만으로 되겠느냐는 반대가 있었으나, 제자 신천이 힘써 청해 종사되었다고 전한다.[1]
- 초상화 - 아들 안우기가 쓴 찬문에 따르면, 1318년(충숙왕 5) 충숙왕이 학교를 일으킨 공을 기려 문묘에 그의 초상을 그려 모시고 고향에서 제사하게 했으며, 이때 흥주 수령이 한 본을 더 그려 향교에 모셨다. 지금 소수 서원에 전하는 안향 초상(국보)은 이 본을 1559년(명종 14) 무렵 화원 이불해가 옮겨 그린 것으로 본다. 찬문의 연도(1318)와 『고려사』의 종사 논의 연도(1319)는 한 해 차이가 난다.[3]
- 백운동 서원 - 1543년(중종 38) 풍기 군수 주세붕이 안향의 고향에 그를 모신 백운동 서원을 세웠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뒤에 소수 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