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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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Moscow 三國外相會議, 1945)는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까지 소련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외무 장관이 모여 한반도에 임시 민주 정부를 세우고 미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하며 최고 5년의 신탁 통치를 협의하기로 결정한 회의이다.
모스크바 3상 회의라고도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뒤의 전후 처리 문제 7개 분야를 다루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한반도 문제였다. 결정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신탁 통치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벌어졌고, 이것이 좌우 대립을 격화시켜 통일 정부 수립을 어렵게 만들었다.[1]
- 임시 민주 정부 수립 - 한국을 독립 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세운다.
- 미소 공동 위원회 설치 - 남쪽의 미군 사령부와 북쪽의 소련군 사령부 대표로 공동 위원회를 만들고, 이 위원회가 한국의 정당·사회단체와 협의해 임시 정부 수립을 돕는다.
- 신탁 통치 - 공동 위원회가 임시 정부와 협의해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최고 5년의 신탁 통치 방안을 만든다.
- 미·소 사령부 회담 - 2주 안에 미·소 양군 사령부 대표 회의를 연다.
- 반탁 운동 - 신탁 통치 소식이 알려지자 김구 등 우익은 이를 제2의 식민 지배로 보고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거세게 벌였다.
- 좌익의 입장 변화 - 좌익은 처음에 반대했으나 1946년 1월 결정을 전체적으로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이로써 찬탁과 반탁으로 좌우 대립이 굳어졌다.
-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1946년 3월) -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렸으나 협의 대상 단체의 범위를 두고 소련은 반탁 단체를 빼자고, 미국은 모두 넣자고 맞서 5월에 휴회했다.[2]
- 정읍 발언과 좌우 합작 운동(1946) - 결렬 뒤 이승만은 남한만의 임시 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여운형·김규식은 좌우 합작 위원회를 만들어 통일 정부 수립을 꾀했다.
-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1947년 5월) - 다시 결렬되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국제 연합(UN)에 넘겼다. UN 총회는 1947년 11월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결의했다.
- 단독 선거 - 소련이 UN 한국 임시 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거부하자 1948년 2월 UN 소총회가 선거가 가능한 지역의 총선거를 결의했고, 이에 맞서 남북 협상이 추진되었다.
| 회의 | 한국 관련 내용 |
|---|---|
| 카이로 회담(1943) |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처음 약속함 |
| 얄타 회담(1945년 2월) | 소련의 대일전 참전 결정, 신탁 통치 구상을 비공식 논의 |
| 포츠담 선언(1945년 7월) | 카이로 선언의 이행을 다시 확인함 |
|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1945년 12월) | 임시 정부 수립, 미소 공동 위원회 설치, 최고 5년 신탁 통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