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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金九, 1876~1949)는 한인 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윤봉길의 의거를 이끌고 충칭 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냈으며, 광복 뒤에는 김규식과 함께 남북 협상을 추진하며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어릴 때 이름은 창암, 뒤에 창수라 했고 호는 백범이다. 동학 농민 운동에서 시작해 애국 계몽 운동, 임시정부, 한인 애국단, 한국광복군으로 이어지는 독립운동의 주요 흐름에 두루 몸담았다. 자서전 『백범일지』를 남겼다.[1]

일제 강점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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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학 - 18세에 동학에 들어가 접주가 되었고, 1894년 동학 농민군 선봉으로 해주성을 공격했다.
  • 치하포 사건(1896) - 을미사변에 분노해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를 죽였다.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고종의 재가가 나지 않아 집행을 면했고, 1898년 탈옥했다.
  • 애국 계몽 운동 - 1905년 을사늑약 반대 상소에 참여했고, 안악 양산 학교 등에서 교육 운동을 펼쳤다. 비밀 결사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 안악 사건(1911) -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 혐의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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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시정부 참여 - 3·1 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내무총장·국무령을 거쳤다. 1930년 이동녕 등과 한국 독립당을 만들었다.
  • 한인 애국단(1931) - 침체한 임시정부를 살리려 의열 투쟁 단체인 한인 애국단을 조직했다. 1932년 1월 이봉창이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졌고, 4월 29일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일왕 생일·전승 기념식장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수뇌를 처단했다.
  • 중국의 지원 - 윤봉길 의거 뒤 장제스가 임시정부를 적극 돕기 시작해, 중국 군관 학교에 한인 특별반이 설치되었다.
  • 충칭 시기 - 1940년 충칭에 정착한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었고, 같은 해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광복군은 미국 전략 정보국(OSS)과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
  • 반탁 운동 - 1945년 11월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신탁 통치 결정에 맞서 반탁 운동을 이끌었다.
  • 남북 협상(1948) - UN 한국 임시 위원단의 북한 입국이 막혀 남한만의 선거가 가시화되자 1948년 2월 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해 단독 정부에 반대했다. 김규식과 함께 평양에 가서 남북 협상에 참석했고, 5·10 총선거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 서거 -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에 맞아 숨졌다.

비슷한 시기의 인물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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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인물
한인 애국단 조직, 김규식과 남북 협상 추진 김구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 결성, 대성 학교 설립 안창호
조선 건국 동맹·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좌우 합작 운동 여운형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주장 이승만
의열단 조직, 조선 혁명 간부 학교 설립, 조선 의용대 창설 김원봉
  1. ↑ 김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