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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呂運亨, 1886~1947)은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광복 직전 조선 건국 동맹을, 광복 직후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이끌었으며, 김규식과 함께 좌우 합작 운동을 벌인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경기도 양평 출신으로 호는 몽양이다. 좌익과 우익 사이에서 연합을 이끌어 내려 한 중도 좌파 지도자였다. 1947년 7월 서울 혜화동에서 암살되었다.[1]

일제 강점기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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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한청년당(1918) -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 조직을 주도했고,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 대표로 보냈다.
  • 임시정부 -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힘써 임시 의정원 의원과 외무부 차장으로 일했다. 같은 해 일본에 건너가 일본 고위 관리들 앞에서 자치론을 반박하고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
  • 투옥 - 1929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와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 조선중앙일보 -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이 되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신문이 문을 닫으며 물러났다.
  • 조선 건국 동맹(1944) - 일제의 패망을 내다보고 국내에서 비밀 결사 조선 건국 동맹을 조직해 위원장이 되었다. 농민 동맹 등 하부 조직을 두고 옌안의 조선 독립 동맹과도 손잡으려 했다.

광복 이후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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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 1945년 8월 15일 조선 총독부로부터 치안권을 넘겨받고 안재홍과 함께 건국 준비 위원회를 만들었다. 전국에 지부와 치안대를 두었다.
  • 조선 인민 공화국 - 9월 건국 준비 위원회가 조선 인민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미군정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11월 조선 인민당을 만들었다.
  • 좌우 합작 운동 - 1946년 5월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휴회하자 김규식과 함께 좌우 합작 위원회를 열었다. 10월 토지 개혁·친일파 처리 등을 담은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했으나 좌우 양쪽의 반발로 힘을 얻지 못했다.
  • 암살 - 1947년 7월 19일 혜화동에서 극우 청년에게 피살되었고, 좌우 합작 운동도 사실상 끝났다.

비슷한 시기의 인물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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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인물
조선 건국 동맹,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좌우 합작 운동 여운형
한인 애국단 조직, 김규식과 남북 협상 추진 김구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주장 이승만
의열단·조선 의용대를 이끎 김원봉
신민회·흥사단 조직 안창호
  1. ↑ 여운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