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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공동 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 1946~1947)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에 따라 한국에 임시 민주 정부를 세우는 일을 돕기 위해 미국과 소련의 점령군 대표로 꾸린 위원회로,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 열렸으나 협의 대상 문제로 결렬되었다.

1946년 3월 20일 덕수궁에서 열린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 개막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는 한국에 임시 정부를 세우고, 미·영·중·소 4개국이 최대 5년 동안 신탁 통치를 하며, 이를 위해 남북의 미·소 점령군 대표로 공동 위원회를 연다고 결정했다. 국내에서는 신탁 통치를 둘러싸고 우익의 반탁 운동과 좌익의 결정 지지(이른바 찬탁)가 맞서면서 좌우 대립이 격해졌다. 미국 측 수석 대표는 아널드 소장, 소련 측 수석 대표는 스티코프 중장이었다.[1][2]

제1차 위원회(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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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최 - 1946년 3월 20일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렸다.
  • 쟁점 -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해 협의할 정당·사회단체를 고르는 문제가 핵심이었다. 소련은 모스크바 결정을 반대하는 반탁 단체를 빼자고 했고, 미국은 의사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이에 맞섰다.
  • 공동 성명 제5호 -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한다는 선언서에 서명한 정당·단체만 협의 대상으로 한다는 타협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서명이 곧 신탁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인지를 두고 다시 맞서 무기 휴회에 들어갔다.
  • 휴회 뒤 - 이승만은 1946년 6월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임시 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했고(정읍 발언), 여운형·김규식 등 중도파는 미군정의 지원 아래 좌우 합작 운동을 펼쳤다.[1]

제2차 위원회(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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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개 - 미·소 외상의 서신 교환 끝에 1947년 5월 21일 다시 열렸다. 김구·이승만 계열을 뺀 대부분의 정당·단체가 참가를 청원해, 6월 말까지 남한 425개, 북한 36개 단체가 청원서를 냈다.
  • 결렬 - 협의 대상 명부를 두고 소련은 반탁 투쟁 위원회 참여 단체를 빼자고, 미국은 청원 단체를 모두 넣자고 맞서 8월 무렵 사실상 결렬되었다. 1947년 10월 소련 대표단이 서울을 떠나면서 위원회는 끝났다.
  • 유엔 이관 - 미국은 1947년 9월 한국 문제를 국제 연합 총회에 넘겼고, 11월 유엔 총회는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 감시 아래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했다. 이것이 1948년 5.10 총선거로 이어졌다.[2]

날짜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공동 성명 제5호 발표일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946년 4월 17일, 우리역사넷 연대기는 4월 18일로 적는다. 제1차 위원회의 무기 휴회는 백과사전이 5월 6일, 우리역사넷이 회의 기간을 3월 20일~5월 9일로 적는다.

광복 직후 국제 회의·기구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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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기구 때 내용
카이로 회담 1943.11 적당한 시기에 한국 독립을 처음 약속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1945.12 임시 정부 수립, 최대 5년 신탁 통치, 미소 공동 위원회 설치 결정
미소 공동 위원회 1946.3~5, 1947.5~10 협의 대상 문제로 두 차례 결렬
유엔 총회 결의 1947.11 유엔 감시 아래 인구 비례 남북 총선거
유엔 소총회 결의 1948.2 선거가 가능한 지역(남한)만의 총선거
  1. ↑ 1.0 1.1 미소공동위원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2. ↑ 2.0 2.1 미소공동위원회, 한국사 연대기,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