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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협상(南北協商, 1948)은 1948년 4월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에서 북한 지도자들과 만나 남한만의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통일 정부를 세우려 한 일련의 정치 회담이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와 그 뒤의 남북 지도자 협의회를 함께 이른다. 남북 연석회의라고도 한다. 단독 정부 노선에 맞선 마지막 통일 정부 수립 시도였으나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남북에는 각각 정부가 들어섰다.[1]

  • 한국 문제의 UN 이관 -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에 따른 미소 공동 위원회가 두 차례 결렬되자, 미국은 1947년 한국 문제를 국제 연합(UN)에 넘겼다. UN 총회는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결의하고 UN 한국 임시 위원단을 보냈다.
  • 선거 가능 지역 총선거 - 소련과 북한이 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거부하자 1948년 2월 UN 소총회는 선거가 가능한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치르기로 결의했다.
  • 국론 분열 -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은 남한만이라도 먼저 정부를 세우자고 했고,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 지도자 회담으로 통일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맞섰다.
  • 회담 제의 - 1948년 2월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의 김일성·김두봉에게 남북 요인 회담을 열자는 편지를 보냈다.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해 분단 정부를 반대했다. 성명은 1948년 2월 10일에 나왔다(→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 연석회의 - 4월 19일부터 평양에서 남북의 정당·사회단체 대표가 모인 연석회의가 열렸다. 김구·김규식은 북행을 막으려는 시위를 뚫고 평양으로 갔다.
  • 4김 회담 -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이 따로 만났고, 이어 남북 지도자 협의회가 공동 성명을 냈다. 성명은 외국 군대의 즉시 철수, 내전 반대, 남한 단독 선거 반대, 통일 정부 수립을 담았다.
  • 5·10 총선거 - 남한에서는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치러져 제헌 국회가 구성되었다. 김구·김규식 등 협상파는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 분단 정부의 수립 -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9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남북 협상은 성과 없이 끝났다. 김원봉 등 일부 참가자는 북에 남았다.
  • 김구 피살 - 이듬해인 1949년 김구가 암살되면서 협상파의 통일 운동은 힘을 잃었다.

통일을 위한 다른 노력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실 사건
김구·김규식이 평양에서 단독 선거 반대 남북 협상(1948)
여운형·김규식의 좌우 합작 위원회, 좌우 합작 7원칙 좌우 합작 운동(1946)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통일 3대 원칙 7·4 남북 공동 성명(1972)
상호 체제 인정, 불가침, 교류 협력 남북 기본 합의서(1991)
  1. ↑ 남북협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