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자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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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는 각 민족이 자기 나라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끝 무렵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전후 처리 원칙으로 내세워 식민지 민족의 독립운동, 특히 1919년 3.1 운동에 큰 자극을 주었다.

윌슨은 전쟁을 끝내고 세계 질서를 새로 짜는 원칙으로 14개조를 발표했는데,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눈길을 가장 끈 것이 민족 자결의 원칙이었다.[1] 같은 무렵 러시아 혁명(1917)을 이끈 세력도 동방의 식민지·종속국 민족과 손잡겠다고 나섰다.[2] 14개조 발표 시기는 흔히 1918년으로 보는데, 『한민족독립운동사』의 해당 절은 1919년으로 적는다.
그러나 이 원칙은 모든 식민지에 적용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패전국(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오스만 제국)이 거느린 민족과 영토에만 적용되어, 오스만 제국에서 떨어져 나온 아랍 지역 등이 독립했을 뿐 승전국 편의 식민지는 대상이 아니었다. 영국을 위해 싸운 인도도 독립하지 못했고, 일본이 지배하던 한국도 외면당했다.[2]
- 파리 강화 회의 대표 파견 -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로 보냈다. 김규식 일행은 3월 13일 파리에 닿았으나 회의 참석을 거부당했고, 청원서를 내고 한국 통신국을 세워 독립을 알렸다.[1]
- 미주 한인의 시도 - 대한인 국민회는 이승만·정한경·민찬호를 파리에 보내려 했으나 미국 정부가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출국을 허가하지 않았다.[1]
- 2.8 독립 선언과 3.1 운동 - 국제 정세의 변화에 힘입어 도쿄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을 발표했고, 이것이 국내 종교계·학생의 만세 시위 준비로 이어져 3.1 운동이 일어났다.[2]
민족 자결주의가 곧바로 한국의 독립을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독립을 국제 사회에 호소할 수 있다는 기대를 키워 3.1 운동의 국제적 배경이 되었다.
| 일 | 때 | 3.1 운동과의 관계 |
|---|---|---|
| 민족 자결주의 제창 | 1918 | 3.1 운동의 국제적 배경 |
| 2.8 독립 선언 | 1919년 2월 | 3.1 운동의 직접 계기 |
| 간도 참변 | 1920 | 3.1 운동 뒤 봉오동·청산리 전투에 대한 일본군의 보복 |
| 6.10 만세 운동 | 1926 | 순종의 인산일에 일어난 만세 시위 |
| 브나로드 운동 | 1931~1934 | 언론사가 주도한 농촌 계몽 운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