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메뉴 여닫기
환경 설정 메뉴 여닫기
개인 메뉴 여닫기
로그인하지 않음
지금 편집한다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될 수 있습니다.

부여 송국리 유적(扶餘 松菊里 遺蹟)은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의 낮은 구릉에 있는 청동기 시대의 큰 마을 유적으로, 집터·무덤·울타리와 비파형 동검, 민무늬 토기, 탄화미가 나와 벼농사를 짓고 계급이 나뉘던 청동기 시대 사회를 보여 준다.

복원된 집터가 있는 부여 송국리 유적

금강 유역의 넓은 들판을 내려다보는 높이 50m 안팎의 구릉 위에 자리 잡았다. 1974년 주민의 신고로 돌널무덤 하나를 수습 조사했는데, 여기서 비파형 동검과 청동 끌, 대롱옥·곱은옥, 간돌검, 간돌화살촉이 함께 나오면서 알려졌다. 이듬해 일대가 농지 개발 지구로 정해지자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부여박물관이 1975년부터 발굴을 시작했다.[1] 1976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발굴 기간은 자료마다 다르게 정리되어 있다. 우리역사넷은 1975년 첫 발굴부터 1997년까지 여러 차례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적었고[2], 디지털부여문화대전은 2021년까지 여러 기관이 모두 26차례 발굴했다고 적었다.[1]

  • 집터 - 100기가 넘게 확인되었다. 바닥을 깊게 판 둥근 집터와 얕게 판 네모난 집터가 함께 있다. 둥근 집터는 가운데에 타원형 구덩이를 파고 그 양쪽 끝에 기둥을 세운 독특한 구조로, '송국리식 집터'라 부른다. 화덕 자리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네모난 집터에는 화덕이 있고, 길이 14m에 이르는 큰 것도 있다.[1]
  • 울타리와 도랑 - 마을 둘레에 나무 울타리(목책)를 세우고 도랑을 팠다. 마을 사이에 다툼과 전쟁이 잦아져 방어 시설이 필요했던 것으로 본다.[2]
  • 무덤 - 구릉 가운데 능선에 돌널무덤·독무덤·움무덤 등이 모여 있다. 비파형 동검이 나온 돌널무덤은 마을 지배층의 무덤으로 보며, 무덤의 껴묻거리 차이는 계급이 생겨났음을 보여 준다.
  • 대형 건물터 - 구릉 꼭대기에 두 줄의 기둥 구멍이 길게 이어진 시설과 큰 건물터가 있다. 마을 전체가 함께 쓰던 공간으로 본다.
  • 비파형 동검 - 악기 비파처럼 칼몸 아래쪽이 넓고 둥글며, 가운데쯤에 뚜렷한 돌기가 있다. 칼몸과 손잡이를 따로 만들어 결합했다. 요령 지방에서 주로 나오는 칼이 한반도 남쪽에서 나왔다는 점이 주목된다.[2]
  • 송국리형 토기 - 바닥이 평평하고 작으며 몸통이 둥글게 부풀고 입 부분이 밖으로 벌어진 민무늬 토기이다. 이 유적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붉은 간토기도 함께 나왔다.
  • 석기 - 반달 돌칼, 돌낫, 홈자귀, 간돌검, 돌화살촉, 가락바퀴 등.
  • 청동 도끼 거푸집 - 부채 모양 청동 도끼를 만들던 돌 거푸집이 집터에서 나와 이곳에서 청동기를 직접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1]
  • 탄화미 - 집터와 구덩이에서 불에 탄 쌀이 많이 나왔고, 볍씨 자국이 찍힌 토기, 조·기장·콩·팥·밀 같은 잡곡도 확인되었다. 이 무렵 금강 유역에서 벼농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이 유적을 표지로 삼는 청동기 시대 중기의 문화를 '송국리 유형'이라 부른다. 이 문화는 바다 건너 일본 규슈로 전해져 야요이 문화가 형성되는 데 영향을 준 것으로 본다.[1]

선사 시대의 생활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생활 모습 시대
동굴이나 강가의 막집에서 살며, 주먹도끼·찍개 같은 뗀석기를 씀 구석기 시대
가락바퀴와 뼈바늘로 옷을 짓기 시작하고, 빗살무늬 토기를 씀 신석기 시대
반달 돌칼로 벼를 거두고, 비파형 동검·민무늬 토기를 쓰며, 구릉 위에 울타리 친 마을을 이룸 청동기 시대 (부여 송국리, 여주 흔암리)
철제 농기구가 퍼지고 세형 동검을 씀 철기 시대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가 널리 퍼짐 고려 이후 (신라 지증왕 때 우경을 장려한 기록이 처음 보임)
  1. ↑ 1.0 1.1 1.2 1.3 1.4 부여 송국리 유적, 디지털부여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부여군, 2026-10-21 확인.
  2. ↑ 2.0 2.1 2.2 청동기 시대 생활 터전, 부여 송국리 유적,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