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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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支石墓)은 큰 덮개돌을 받침돌이나 돌무덤 위에 얹어 만든 무덤으로, 한반도에서는 청동기 시대에 지배층의 무덤으로 널리 만들어졌다.

한자로는 지석묘라 한다. 큰 돌을 '고여' 놓았다는 데서 고인돌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한반도 전역에 퍼져 있으며, 껴묻거리로 민무늬 토기·붉은 간토기·반달 돌칼·간돌검·돌화살촉 등이 나오고, 전라남도 지역의 고인돌에서는 비파형 동검이 깨진 조각이나 다시 고쳐 쓴 상태로 나오는 일이 많다.[1]
수십 톤에 이르는 덮개돌을 캐어 옮기고 들어 올리려면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부려야 했다. 그래서 고인돌은 그만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 권력, 곧 군장이 나타났음을 보여 주는 유적으로 본다.
- 탁자식(북방식) - 땅 위에 판돌을 세워 네모난 무덤 칸을 만들고 그 위에 넓고 얇은 덮개돌을 얹었다. 대동강·재령강 유역 등 한강 이북에 많고, 남쪽에서는 드물다. 강화 부근리 고인돌이 대표적이다.
- 바둑판식(남방식) - 땅속에 돌널이나 돌덧널을 만들어 주검을 넣고, 작은 받침돌 위에 두꺼운 덮개돌을 얹었다. 전라도·경상도 등 한강 이남에 많다.
- 개석식 - 받침돌 없이 덮개돌이 땅속 무덤 칸을 바로 덮는 형식이다.
2000년 12월 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함께 등재되었다. 국가유산청은 이 세 곳을 합해 약 1,200기로 소개한다.[2]
- 고창 - 고창군 죽림리·도산리 일대에 447기가 모여 있어 국내에서 가장 큰 고인돌 무리이다. 10톤 미만부터 300톤에 이르는 것까지 여러 형식이 섞여 있다.
- 화순 - 계곡을 따라 596기가 흩어져 있고, 덮개돌을 떼어 낸 채석장이 남아 있어 돌을 캐고 옮긴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 강화 - 고려산 기슭에 160여 기가 있다. 부근리 고인돌은 국내에서 가장 큰 탁자식 고인돌이다.
- ↑ 선사시대의 묘제와 부장품, 『한국문화사』 5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19 확인.
- ↑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 국가유산포털 유네스코 등재 유산, 국가유산청,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