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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 대첩(龜州大捷, 1019)은 거란의 3차 침입 때 상원수 강감찬이 이끈 고려군이 1019년(현종 10) 2월 귀주에서 돌아가던 거란군을 크게 무찌른 싸움이다.

993년 1차 침입 뒤 고려는 압록강 동쪽에 강동 6주를 두었다. 거란은 이 땅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고 현종의 친조(직접 입조)도 이루어지지 않자, 1018년(현종 9) 12월 소배압에게 10만 군사를 주어 세 번째로 쳐들어왔다. 고려는 서북면행영도통사 강감찬을 상원수,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300명의 군사로 맞섰다.[1] 구주라고도 읽으며, 『고려사』 열전은 이때의 거란 장수를 소손녕으로 적었으나 실제로는 그의 형 소배압이다.

  • 흥화진 싸움 - 강감찬은 흥화진에 기병 1만 2천 명을 산골짜기에 숨기고, 큰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아 두었다. 거란군이 오자 막았던 물을 터뜨리고 복병을 내보내 크게 이겼다.
  • 개경 방어 - 거란군은 곧장 개경으로 내려갔으나 강민첨이 자주에서, 조원이 마탄에서 뒤쫓아 쳤다. 강감찬은 병마판관 김종현에게 1만 명을 주어 개경을 지키게 했고, 거란군은 개경 가까이까지 왔다가 되돌아섰다.
  • 귀주 싸움 - 1019년 2월 거란군이 귀주를 지나자 강감찬이 동쪽 들에서 맞아 싸웠다. 승부가 나지 않던 중 김종현의 군사가 도착하고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자 고려군이 기세를 타고 몰아쳤다. 석천을 건너 반령까지 쫓았으며,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수천에 불과했다.[2]

현종은 영파역까지 나와 개선하는 강감찬을 맞고 금꽃 여덟 가지를 머리에 꽂아 주었다. 크게 진 거란은 더 이상 대군을 보내지 못했다.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쓰는 대신 강동 6주를 지켰으며, 강감찬의 건의로 개경에 나성을 쌓고(1029) 이어 천리장성을 쌓았다(→ 고려 거란 전쟁).

다른 승리와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싸움 때 지휘
귀주 대첩 1019년, 거란 3차 침입 강감찬
살수 대첩 612년, 수의 침입 을지문덕(고구려)
처인성 전투 1232년, 몽골 2차 침입 김윤후(→ 고려 몽골 전쟁)
진포 대첩 1380년, 왜구 나세·최무선
한산도 대첩 1592년 이순신(→ 임진왜란)
  1. ↑ 『고려사』 권94 열전7 강감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8 확인.
  2. ↑ 구주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