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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聖王, ?~554, 재위 523~554)은 백제의 제26대 왕으로, 사비로 도읍을 옮겨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한강 하류를 되찾았으나 신라에 빼앗긴 뒤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름은 명농이고 무령왕의 아들이다. 웅진 시기 무령왕이 다져 놓은 왕권 강화 정책을 이어받아, 538년 웅진(공주)에서 넓은 들을 낀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 했다. 부여에서 나왔다는 계통 의식을 내세운 것이다. 중앙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중국 남조의 양, 왜와 활발히 교류했으며,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는 데 힘을 쏟았다.[1]

  • 사비 천도(538) - 고구려에 밀려 급히 옮긴 웅진 천도(475, 문주왕)와 달리 미리 계획해 옮겼다. 사비 지역의 사씨 세력이 이를 뒷받침했다. 사비 도성의 왕궁 터·부소산성·나성 등은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세계 유산에 올랐다.
  • 22부 - 왕실 일을 맡은 내관 12부와 나랏일을 맡은 외관 10부를 두었다.
  • 5부·5방 - 수도를 5부로 나누고, 지방은 5방으로 나누어 그 아래 군과 성을 두었다. 종래 왕족을 보내던 22담로 체제를 바꾼 것이다.
  • 1품 좌평에서 16품 극우에 이르는 16관등을 정비해 귀족 회의의 발언권을 줄이고 왕 중심의 정치를 다졌다.

대외 관계와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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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과의 교류 - 양에 사신을 보내 모시박사와 장인·화공을 초빙하고 불경을 들여왔다.
  • 계율 정비 - 인도에서 율장을 가져온 승려 겸익을 우대해 번역하게 했다.
  • 일본에 불교 전파 - 달솔 노리사치계를 왜에 보내 불상과 경론을 전했다.

한강 유역 회복과 관산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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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살성 점령(550) - 장군 달기를 보내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았다. 이어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치자, 그 틈에 신라의 이사부가 두 성을 모두 차지했다.
  • 한강 하류 회복(551) - 신라·가야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하류 6군을 되찾았다. 신라는 한강 상류 10군을 얻었다.
  • 신라의 배신(553) - 신라 진흥왕이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마저 빼앗아 신주를 두었다. 이로써 433년부터 이어진 나제 동맹이 깨졌다.
  • 관산성 전투(554) - 태자 창(뒤의 위덕왕)이 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을 공격하자, 성왕은 태자를 돕기 위해 소수의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다가 매복한 신라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했다. 신라 쪽에서는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이 군대를 이끌었다. 이 패배로 좌평 4명과 군사 3만여 명을 잃었다.

백제의 다른 왕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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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왕
사비 천도, 국호 남부여, 22부 정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 성왕
고흥에게 역사서 『서기』를 편찬하게 함, 평양성 공격 근초고왕
동진에서 온 마라난타를 통해 불교 수용 침류왕
고구려의 한성 함락 뒤 웅진으로 천도 문주왕
백가의 난 평정, 22담로에 왕족 파견, 양과 교류 무령왕
익산(금마저)에 미륵사 창건 무왕
  1. ↑ 성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