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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전(市廛)은 도성의 큰길가에 국가가 지은 상설 점포로, 조선에서는 한양 종로 일대의 시전 상인이 관청에 물품을 대는 의무를 지는 대신 특정 물품의 독점 판매권을 누렸으며, 조선 후기 난전의 성장으로 그 특권이 무너졌다.

김정호가 그린 서울 지도 「수선전도」. 종로를 중심으로 시전 거리가 뻗어 있었다.

유교 국가의 도성은 궁궐 앞에 조정, 뒤에 시장을 둔다는 원칙에 따라 꾸며졌고, 시전은 종묘·사직과 함께 도성의 기본 요소였다. 농사를 짓지 않는 도성 사람의 생계, 궁궐과 관청에 필요한 물자 조달, 외국과의 무역을 위해 시전이 꼭 필요했다.[1]

  • 신라 - 490년(소지왕 12) 경주에 처음 시장을 열었고, 509년(지증왕 10) 동시와 이를 감독하는 동시전을 두었다. 통일 뒤 695년(효소왕 4)에 서시·남시를 더했다.
  • 고려 - 919년 개경에 도읍하며 시전을 지었고, 1208년(희종 4) 광화문에서 십자가에 이르는 길 양쪽에 큰 시전 행랑을 다시 지었다. 경시서가 물가와 시전을 감독했다.
  • 조선 초 - 태종이 1412년부터 네 차례 공사로 종루(지금의 종로)를 중심으로 창덕궁 입구·남대문·동대문 방향 길 양쪽에 수천 칸의 행랑을 지어 상인에게 빌려주고 공랑세를 받았다. 관청이 요구하는 물품을 제때 대는 국역(책판)이 시전의 주된 의무였다.[1]
  • 육의전 - 시전 가운데 규모가 큰 선전(비단)·면포전·면주전·지전(종이)·저포전(모시)·내외어물전의 여섯을 육의전이라 했다.

금난전권과 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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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부터 시전에 등록하지 않은 상인(사상)의 활동이 커지자, 이들을 '난전'이라 부르며 막았다. 17세기 무렵 정부는 시전 상인에게 난전을 직접 단속할 권한, 곧 금난전권을 주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 시전 수가 크게 늘고 저마다 금난전권을 함부로 휘둘러 문제가 커졌다. 1791년(정조 15) 정부는 신해통공으로 육의전을 뺀 시전의 금난전권을 없앴다.[1]

18세기 서울이 전국 시장의 중심으로 커지면서 종로 시전 거리와 함께 난전 상인의 상설 시장인 동대문 안의 이현과 남대문 밖의 칠패가 서울의 3대 시장으로 자랐다. 칠패에서 거래된 어물은 내·외어물전보다 열 배나 많았다고 한다. 한성부 관할 밖이라 금난전권이 미치지 않던 광주 송파장과 양주 누원점은 사상들이 서울을 거치지 않고 물건을 돌리는 거점이 되었다. 이렇게 시전 중심의 상업 체제는 무너지고 사상 중심의 체제가 자리 잡았다.[2]

시대별 시장 감독 기구와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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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사실 시대
동시를 열고 동시전을 둠 신라 지증왕(509)
경시서가 개경 시전 감독 고려
종루 일대에 행랑 시전 건설, 경시서(뒤의 평시서)가 감독 조선 태종
시전의 금난전권 강화 17세기
신해통공으로 육의전 외 금난전권 폐지 정조(1791)
이현·칠패의 성장, 송파장의 사상 조선 후기 (→ 조선 후기의 경제)
  1. ↑ 1.0 1.1 1.2 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2. ↑ 상업도시로의 성장, 『신편 한국사』 33 조선 후기의 경제,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