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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통공(辛亥通共)은 1791년(정조 15, 신해년) 좌의정 채제공의 건의로 육의전을 뺀 나머지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없애 누구나 자유롭게 장사할 수 있게 한 조선 후기의 상업 정책이다.

신해통공을 건의한 채제공의 초상(이명기 그림)

시전 상인은 나라에 물품을 대는 국역을 지는 대신, 허가받지 않은 상인(난전)을 단속할 수 있는 금난전권을 받았다. 18세기에 상업이 발달하자 새 상품을 다루는 상인들까지 시전을 만들어 금난전권을 얻었고, 서울의 상업은 특권 상인의 독점 아래 놓였다. 그 결과 물가가 크게 오르고 영세 상인과 수공업자, 도시 빈민의 생계가 어려워졌다. 특권 상인은 노론 벌열과 이어져 있어, 정조의 탕평 정치와 남인 세력에게도 금난전권은 견제할 대상이었다.[1]

1791년 1월 25일 차대에서 남인의 영수인 좌의정 채제공은 서울 백성의 가장 큰 고통이 도고(독점 상인)에 있다고 지적했다. 무뢰배가 시전 이름을 내세워 생필품을 독점하고 이를 어기면 난전으로 몰아 잡아들여 물가가 서너 배로 올랐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 20~30년 사이에 새로 생긴 시전을 모두 없애고, 육의전 이외의 물건을 파는 사람을 난전으로 잡지 못하게 하자고 건의했으며, 정조가 신하들의 의견을 들은 뒤 이를 따랐다(『정조실록』 15년 1월 25일).[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없앨 시전을 '30년 이내에 세운 것'으로 적는다.

  • 각 시전이 지던 국역은 그대로 두었다.
  • 육의전(입전·면포전·면주전·포전·저전·지전)만 금난전권을 유지했다.
  • 이로써 사상(私商)이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게 되었다.
  • 앞선 통공 - 금난전권을 줄이자는 논의는 1764년(영조 40)에 이미 있었고, 1787년(정조 11)에 일부 시행되었다(정미통공).
  • 갑인통공 - 1794년(정조 18) 갑인통공으로 신해통공의 원칙이 다시 확인되었다.[1]
  • 결과 - 금난전권을 잃은 시전은 이를 되살려 달라거나 육의전에 끼워 달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상의 활동이 활발해져 서울의 상업이 크게 발달했다. 한편 자본을 가진 사상이 독점을 키웠다는 평가도 있다.[2]

다른 정책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정책 시대 내용
신해통공 조선 정조(1791) 육의전 외 시전의 금난전권 폐지
균역법 조선 영조(1750) 군포를 1년 1필로 줄임
상평통보 법화 채택 조선 숙종(1678) 동전 유통 (→ 상평통보)
서울 상인의 상권 수호 운동 개항기 외국 상인의 침투에 맞섬 (→ 상권 수호 운동)
  1. ↑ 1.0 1.1 신해통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2.0 2.1 신해통공, 사료로 본 한국사,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