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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金奎植, 1881~1950)은 1919년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가서 독립을 청원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총장·부주석을 지냈으며, 광복 뒤 여운형과 함께 좌우 합작 운동을, 김구와 함께 남북 협상을 이끈 독립운동가·정치인이다. 호는 우사(尤史)이다.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 의장 시절의 김규식

1881년 동래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고, 1897년 미국으로 건너가 로노크 대학을 졸업한 뒤 프린스턴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04년 귀국해 언더우드의 비서, YMCA 학교 교사, 경신 학교 학감으로 일하며 새문안 교회 장로가 되었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해 상하이의 동제사에 들어갔고, 몽골 지역에서 상업에 종사하기도 했다.[1]

  • 파리 강화 회의(1919) - 1918년 신한청년당은 미국 윌슨 대통령의 특사 크레인을 만난 뒤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보내기로 했다. 김규식은 1919년 2월 상하이를 떠나 3월 파리에 도착해 한국 공보국을 열었고, 임시정부가 세워지자 외무총장 겸 파리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5월에 독립 청원서를 냈으나 일본의 방해로 회의에서 다루어지지 못했다.
  • 구미 위원부 -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 구미 위원부 위원장을 맡았다.
  • 국민 대표 회의(1923) - 1922년 모스크바 극동 피압박 민족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고, 1923년 국민 대표 회의에서는 창조파에 섰다.
  • 민족 혁명당 - 1932년 한국 대일 전선 통일 동맹 결성에 참여했고, 1935년 민족 혁명당 창당에 참여해 주석을 맡았다. 실질적인 지도자는 김원봉이었다.
  • 임시정부 부주석 - 1942년 민족 혁명당 대표로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었고, 1944년 개헌으로 주석 김구 아래 부주석에 뽑혔다.[1]
  • 귀국과 미소 공동 위원회 - 1945년 11월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했다. 처음에는 반탁 운동에 참여했으나, 모스크바 결정에 따른 임시 정부 수립이 급하다고 보고 미소 공동 위원회 참여 쪽으로 돌아섰다.
  • 좌우 합작 운동 -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자 1946년 7월 여운형과 좌우 합작 위원회를 꾸려 10월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했다. 12월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 의장이 되었다. 1947년 여운형이 암살되자 민족 자주 연맹을 만들어 중도 세력을 모았다.
  • 남북 협상 - 유엔 소총회가 남한만의 총선거를 결의하자 1948년 2월 김구와 함께 북측에 남북 지도자 회담을 제안했고, 4월 평양에 가서 김구·김일성·김두봉과 4자 회담을 했다. 성과 없이 돌아온 뒤 5.10 총선거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 납북 - 1950년 6.25 전쟁 때 북한으로 끌려갔고, 그해 12월 만포진 부근에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2]

출처마다 어긋나는 데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김규식이 파리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했다고 적지만, 우리역사넷은 그가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에 참여한 뒤 그 대표로 파리에 갔다고 적는다. 극동 피압박 민족 대회 참석도 백과사전은 1921년, 우리역사넷은 1922년 1월 모스크바로 적는다.

같은 이름의 독립운동가로 북로 군정서의 대대장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고 대한 독립 군단에서 활동한 노은(老隱) 김규식이 있다.

광복 직후 중도 세력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인물 주요 활동
김규식 좌우 합작 위원회(우익 대표), 과도 입법 의원 의장, 민족 자주 연맹, 남북 협상
여운형 조선 건국 동맹·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좌우 합작 위원회(좌익 대표), 1947년 암살
김구 한국 독립당, 반탁 운동, 남북 협상, 1949년 암살
이승만 정읍 발언(남한 단독 정부 수립 주장), 초대 대통령
  1. ↑ 1.0 1.1 김규식, 한국사 연대기,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21 확인.
  2. ↑ 김규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