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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만인소(嶺南萬人疏, 1881)는 1881년(고종 18) 2월 이황의 후손 이만손을 소두로 한 영남 유생들이 『조선책략』의 유포와 정부의 개화 정책에 반대해 연명으로 올린 상소이다.

1880년 2차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에서 청 외교관 황쭌셴이 지은 『조선책략』을 들여와 고종에게 바쳤다. 이 책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면 조선이 중국과 친하고(친중국), 일본과 맺고(결일본), 미국과 이어져야(연미국) 한다고 권했다. 정부가 이를 바탕으로 통리기무아문을 세우고 미국과의 수교를 준비하자, 안동·상주 등 영남 유생들이 위정척사론을 내세워 반대에 나섰다.[1]

상소는 『조선책략』의 주장을 하나하나 반박했다.[2]

  • 중국 - 200년 넘게 신의를 나눈 중국을 두고 황(皇)·짐(朕)을 칭하는 일본의 국서를 받으면 중국에 해명할 길이 없다.
  • 일본 - 이미 육지와 바다의 요충지를 차지한 일본이 우리의 허술함을 보고 충돌을 일으키면 막기 어렵다.
  • 미국 -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를 남의 말만 듣고 끌어들이면 재물을 요구하고 약점을 노릴 것이다.
  • 서학과 기독교 -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법은 옛 제도에 있으며, 기독교 전파는 사교를 퍼뜨리려는 간계이다.

이만손은 책을 가져온 김홍집과 대신들을 규탄하고, 책을 물이나 불에 던져 버리라고 요구했다.

고종은 2월 26일 "사학을 물리치고 정학을 지키는 일은 상소를 기다릴 필요도 없고, 남의 나라 사람이 사사로이 쓴 글은 따질 것이 못 된다"며 물러가라고 명했다. 이만손은 3월에 다시 상소했고, 경기·충청·강원·전라의 유생들이 잇따라 상소해 척사 운동이 전국으로 번졌다(신사 척사 운동). 이만손은 유배되었고, 같은 해 강원도 유생 홍재학은 격렬한 만언소를 올렸다가 처형되었다.[2]

위정척사 운동의 흐름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시기 주장 대표 인물
1860년대 통상 반대, 척화 주전론 이항로, 기정진
1870년대 개항 반대, 왜양일체론 최익현
1880년대 『조선책략』 유포·개화 정책 반대 이만손(영남 만인소), 홍재학
1890년대 항일 의병 (→ 항일 의병 운동) 유인석

영남 만인소와 같은 이름의 만인소는 정조 때 사도 세자의 신원을 청한 것(1792) 등 여러 차례 있었다. 1855년 사도 세자 추존 만인소와 1884년 복제 개혁 반대 만인소 원본은 2018년 '만인의 청원, 만인소'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기록유산에 올랐다.[1]

  1. ↑ 1.0 1.1 만인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2. ↑ 2.0 2.1 신사년의 위정척사운동과 척사·개화논쟁, 『신편 한국사』 38 개화와 수구의 갈등,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